“굽이치는 강물 따라 단풍을 따라”…영월에서 가을을 천천히 걷는 법
요즘 가을 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사진 한 장 남기고 떠나는 속도보다, 강물 소리와 낙엽 색을 오래 느낄 수 있는 곳이 더 끌린다. 강을 따라 걷고, 단풍 아래 앉아 쉬고, 그 고요함을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으로 마무리하는 여행이 영월에서의 일상이 되고 있다.
영월은 강원 남부의 산과 강이 품을 맞댄 고장이다. 동강과 서강이 굽이치며 흐르는 길을 따라 기암괴석이 서 있고, 가을이면 붉고 노란 단풍이 강물 위로 그림자처럼 내려앉는다. 그래서 요즘 SNS에는 영월의 강가 풍경과 단풍샷, 캠핑 장비를 배경으로 한 사진들이 자주 올라온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한적해서 더 좋았다”, “하루쯤 숨 고르기 좋은 곳”이었다고 표현한다.

영월읍 방절리에 자리한 선돌은 그런 영월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풍경이다. 서강을 굽어보며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두 개가 강가를 지키고 있다. 마치 누군가 정성스레 깎아 세워둔 조형물 같아 처음 마주하는 순간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춘다. 주변에 전해 내려오는 소원 설화 덕분에, 방문객들은 바위를 바라보며 마음속 작은 소망을 조심스레 떠올리곤 한다. 가을이면 절벽 아래 숲이 단풍으로 물들어 선돌의 회색빛과 대비를 이루고, 그 사이로 강물이 유유히 흐른다. 강변 산책로를 잠시만 걸어도 각도에 따라 바위의 표정과 강의 색이 달라져 눈을 떼기 어렵다.
도심의 소음을 완전히 벗어나고 싶다면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계곡캠핑장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다. 김삿갓계곡 끝자락에 자리 잡은 이곳에서는 사계절 내내 일급수 계곡물이 흐른다. 계곡을 마주한 데크존에서는 텐트 앞에만 앉아 있어도 물소리와 단풍이 한 화면에 담기고, 20년 이상 자란 수목이 그늘을 드리우는 사이트존에서는 한낮에도 공기가 차분하다. 펜션존은 아이와 함께 온 가족들이 편안히 머물기 좋다. 가을밤, 불빛이 잦아든 캠핑장에선 모닥불 대신 별빛과 물소리가 배경이 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여행을 온 게 아니라 잠시 숲에 맡겨진 기분이었다”고 느낀다.
자연 풍경만으로는 아쉬운 이들에게는 예술 산책이 기다리고 있다. 주천면 주천리에 자리한 하슬라아트월드 영월지점은 숲과 작품이 섞여 있는 야외 미술 공간이다. 넓은 부지 곳곳에 조각과 설치 작품이 놓여 있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작은 전시를 이어가는 느낌을 준다. 계절에 따라 숲의 색이 변하고 그 위로 작품의 분위기도 달라져, 한 작품을 똑같은 배경으로 두 번 보기 어렵다. 방문객들은 탁 트인 시야로 주변 산세와 하늘을 함께 바라보며 “사진보다 눈으로 오래 담고 싶었다”고 말한다. 예술을 보러 갔다가 어느새 바람 냄새와 빛의 각도까지 기억하게 되는 경험이다.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입안이 기억하는 한 끼다. 영월읍 덕포리에 자리한 별애별빵1984는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로컬 베이커리 카페로, 영월에서 난 재료로 구운 빵을 선보인다. 40년 경력의 셰프가 1984년부터 이어온 제빵 기술로 찰빵, 달빵, 떡빵, 석탄빵, 곤드레빵, 별총총빵 등 이름부터 영월을 떠올리게 하는 메뉴들이 줄지어 있다. 영월 기차역과 5일장이 열리는 동강둔치에서 도보로 닿을 수 있어, 기차를 타고 온 여행객도 가볍게 들른다. 단풍빛으로 물든 오후, 창가에 앉아 따뜻한 커피와 빵 한 조각을 곁들이면 “이 도시의 시간을 천천히 맛보고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이런 변화는 여행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보인다. 예전처럼 여러 명소를 바쁘게 돌아다니기보다, 선돌에서 오래 서 있고, 계곡에서 잠시 눈을 감고, 아트월드에서 한 작품 앞에 머물며, 카페에서 혼자 일기를 쓰는 여행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여행의 목적이 ‘많이 보기’에서 ‘깊게 느끼기’로 옮겨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영월에서의 하루는 일정표가 아니라,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천천히 이어지는 한 줄의 이야기처럼 흐른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주말에 영월 다녀왔더니 한 주가 버틸 만해졌다”, “큰 볼거리는 없는데 이상하게 또 가고 싶다”는 글이 자주 보인다. 화려한 관광지보다는, 조용히 나를 쉬게 해주는 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이 겹쳐진다. 가을의 영월은 그런 마음을 담아 줄 그릇처럼 존재한다.
가을은 짧고, 일상은 길다. 선돌의 단풍빛, 김삿갓계곡의 물소리, 숲을 배경으로 선 작품들, 그리고 로컬 빵의 따뜻한 향까지. 모두 다녀오면 어느새 마음 한켠의 속도가 조금 느려져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