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이 적시는 가을비”…섬진강변, 광양의 여유가 남다르다
요즘은 빗소리를 들으며 거니는 사람이 늘었다. 예전엔 비 오는 날이면 외출을 망설였지만, 이제는 빗속 산책이 다정하게 곁을 내어준다. 사소한 풍경의 변화지만, 그 안엔 넉넉하고 여유로운 삶의 태도가 스며있다.
광양으로 가을비가 내린다. 섬진강을 끼고 흐르는 이 도시는 가을이면 더욱 고즈넉하다. 흐리고 비가 오는 날, 광양와인동굴을 찾는 이들도 많다. 폐터널을 창의적으로 꾸민 이 곳에선 시원한 공기와 함께 와인, 미디어 아트, 조형물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비가 내리는 바깥과 달리 동굴 안은 촘촘한 조명과 음악, 은은한 와인 향기가 어우러져 그 자체로 이국적이다. 아이 손을 잡거나 친구, 연인과 함께 실내에 머물면서도 가을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숨겨진 명소다.

이런 변화는 지역 곳곳에서도 감지된다. 다압면 매화 정보화마을에선 섬진강변을 끼고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었다. 가을비가 강물 위로 내려앉으면 옅은 안개가 피어올라 몽환적인 풍경이 만들어진다. “비 오는 날에만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있다”며 순례하듯 카메라를 메고 나서는 이들도 많아졌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자연이 선사하는 고요함에 위로받게 되는 기분이 들었다는 소감이 이어진다.
역사가 숨 쉬는 자리도 있다. 옥룡면 추산리, 오랜 동백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옥룡사지는 천년고찰의 흔적과 함께 국가사적의 위엄을 간직한다. 빗방울이 동백잎을 적실 때면 숲속은 한층 더 깊고 조용해진다. 혼자 걷는 이들은 “비 내리는 숲길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기분이었다”고 고백한다.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문득 삶의 속도를 천천히 되돌아보게 된다.
전문가들은 이런 ‘비 오는 날의 여행’을 감성적 힐링으로 본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회복되는 시대, 자연의 작은 변화에 귀 기울이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며 트렌드 분석가는 설명했다. 지역 커뮤니티에도 “이젠 날씨가 궂을수록 오히려 외출하고 싶어진다”는 반응이 등장한다.
고요한 비 내림, 안개와 강물, 오래된 숲. 그 풍경 속을 천천히 거닐 때 우리는 세상의 번잡에서 멀어지며, 일상에 새로운 숨을 들이마신다.
작고 느린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