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CDMO 전환”…삼성바이오, 에피스 분할로 글로벌 수주 노린다
CDMO 위탁개발생산 모델이 글로벌 바이오 생산 패러다임을 재편하는 가운데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사업 구조를 재정비하며 순수 CDMO 기업으로 새 출발했다. 인적분할을 통해 바이오시밀러와 신약 개발 부문을 떼어내고 고객사와의 이해상충 요소를 제거하면서, 대형 제약사 대상 위탁 생산 수주 경쟁에서 입지를 한층 강화하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이번 분할과 재상장을 글로벌 CDMO 시장 내 한국 기업 영향력 확대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 인적분할된 삼성에피스홀딩스는 24일 유가증권시장에 재상장했다. 같은 날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변경상장을 마치고 거래를 재개하며, 법적으로와 사업적으로 CDMO 단일 사업 구조를 확립했다. 시장에서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생산 위탁에 집중하고, 삼성에피스홀딩스가 바이오시밀러·신약을 축으로 한 투자·개발 플랫폼 역할을 맡게 됐다고 정리한다.

이번 인적분할의 핵심은 CDMO 사업과 바이오시밀러·신약 사업의 완전 분리다. 그동안 글로벌 빅파마 일부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바이오시밀러를 개발하는 자회사 삼성바이오에피스를 보유하고 있어, 위탁생산 과정에서 신약 조성 정보가 내부적으로 공유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해 왔다. 인적분할을 통해 지배구조상 분리된 별도 상장사로 바뀌면서 이러한 이해상충 논란을 차단하고, CDMO 고객 포트폴리오 확대에 나서겠다는 전략이다.
정이수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CDMO와 바이오시밀러 사업 분리가 글로벌 고객사 신뢰도 제고와 신규 수주 확대에 기여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삼성바이오에피스와 잠재 고객사 간 바이오의약품 제품 포트폴리오 중복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면서, 향후 바이오의약품 블록버스터 특허 만료 물량이 늘어날 때 수주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블록버스터는 연 매출 1조원 이상급 대형 의약품을 의미하며, 특허 만료 시 생산과 개발 수요가 대거 재배치되는 만큼 CDMO에 큰 기회로 작용한다.
정 연구원은 기업 가치도 분리해 산정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적정 가치를 96조6000억원, 삼성에피스홀딩스를 12조1000억원으로 제시하며, 순수 CDMO 구조를 갖춘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추가 상승 여력이 있는 반면 에피스홀딩스는 재상장 직후 단기 조정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는 단기 실적 가시성이 높은 위탁생산과 달리, 바이오시밀러와 신약 개발 부문이 임상·허가 단계에 따라 가치 변동성이 크다는 점을 반영한 평가로 풀이된다.
삼성에피스홀딩스는 바이오 투자 지주회사 형태로, 바이오시밀러 사업을 담당하는 삼성바이오에피스와 바이오 기술 플랫폼 개발기업 에피스넥스랩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포트폴리오 구조상 안정적인 현금창출 기반과 고위험·고수익 신약 개발 옵션을 동시에 가져가는 형태다. 지주사 레벨에서 파이프라인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면서 다양한 기술 제휴와 투자 유치를 추진하기 유리한 구도라는 평가도 뒤따른다.
이번에 신설된 에피스넥스랩은 펩타이드 관련 요소기술 등 플랫폼 기술 개발을 전담한다. 펩타이드는 아미노산이 짧게 연결된 구조로, 비만·대사질환 치료제 등에서 주목받는 모달리티다. 에피스넥스랩은 펩타이드 기반 신약 후보 발굴뿐 아니라 이중항체, 항체 약물 접합체 등 차세대 바이오 의약품과 연계 가능한 기술 플랫폼을 구축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확보한 플랫폼을 바탕으로 글로벌 제약사와의 공동 개발, 기술 이전 등을 추진해 수익 구조를 다각화한다는 구상도 내놓고 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기존 바이오시밀러 사업에 더해 항체 약물 접합체 ADC 후보물질 개발을 진행 중이다. ADC는 항체에 고독성 항암제를 결합해 종양 세포에만 약물을 선택적으로 전달하는 기술로, 표적 치료 효율을 높이면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차세대 항암제 플랫폼으로 꼽힌다. 지난달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중국 바이오 기업 프론트라인 바이오파마와 ADC 후보물질 2종 공동개발 계약을 체결하며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있다.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전략은 바이오시밀러 사업으로 확보한 안정적인 현금창출 기반을 유지하면서, 에피스넥스랩과의 연구개발 시너지를 통해 신약 개발 영역으로 외연을 넓히는 방향이다. 바이오시밀러는 오리지널 바이오의약품의 특허 만료 이후 개발되는 복제약으로, 상대적으로 개발 리스크가 낮다. 반면 ADC나 펩타이드 신약은 임상·규제 허들을 넘어야 하지만 성공 시 높은 부가가치가 기대된다. 두 축을 결합해 성장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노리는 구조다.
정 연구원은 삼성바이오에피스가 개발 중인 ADC 후보물질에 대해 연내 임상시험계획 IND 제출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내년에는 방광암 적응증을 대상으로 임상 1상 진입을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에피스넥스랩 역시 비만 치료제용 펩타이드와 이중항체 ADC 플랫폼 구축에 속도를 내며 신약 파이프라인 확장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비만·대사질환과 종양 분야에서 차세대 바이오 의약품을 적극 확보하는 흐름과 맞물려, 기술 라이선싱과 공동 개발 기회도 늘어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지배구조 개편은 글로벌 CDMO 시장 지형 변화와도 연결된다. 미국과 유럽 주요 제약사들은 생산거점을 다변화하고, 특정 국가·기업 의존도를 낮추는 방향으로 공급망 전략을 재편하고 있다. 특히 고부가가치 항체의약품과 ADC 등은 대량 생산과 품질 관리가 까다로운 만큼, 대형 CDMO에 대한 선호가 강하게 나타난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순수 CDMO 체제로 전환하면서 이 같은 수요를 선제적으로 흡수하겠다는 방침이다.
정책 환경 측면에서도 삼성바이오로직스를 둘러싼 외부 변수는 변곡점을 맞고 있다. 미국 의회가 중국 바이오 공급망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생물보안법을 국방수권법 NDAA 개정안에 포함해 지난달 통과시키면서, 중국계 CDMO와 연구기관에 대한 규제가 강화될 가능성이 부각됐다. 이에 따라 미국계와 유럽계 제약사가 생산 거점을 한국 등 우호국으로 이전하거나 신규 위탁생산 파트너를 찾을 개연성이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달미 상상인증권 연구원은 미국 내에서 중국계 공급망 의존도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며,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지난해부터 수주금액 확대를 통해 이미 일부 반사 수혜를 누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글로벌 CDMO 시장에서는 지리적 리스크와 규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파트너에 대한 선호가 커지고 있어, 생산능력 확보와 품질·규제 대응 경험을 갖춘 기업에 수주가 집중되는 추세다.
업계에서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순수 CDMO 전환과 삼성에피스홀딩스의 재상장이 한국 바이오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을 촉진할 수 있다는 평가도 내놓고 있다. 대형 CDMO가 글로벌 생산 허브를 맡고, 별도 상장 지주사가 바이오시밀러와 신약 개발 리스크를 분리해 관리하는 구조가 정착될 경우, 투자자와 고객사 모두에게 사업 구조가 한층 투명해질 수 있어서다.
다만 신약과 플랫폼 개발을 담당하는 삼성바이오에피스와 에피스넥스랩은 임상 결과와 기술 거래 성과에 따라 기업 가치 변동성이 커질 여지도 있다. 글로벌 경기 변동, 규제 강화, 경쟁사 신약 출시 등에 따라 파이프라인 가치가 재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 CDMO 체제로 전환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역시 설비 증설 타이밍과 수주 포트폴리오 관리가 수익성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구조 개편을 계기로 국내 CDMO와 바이오 개발 기업 간 역할 분담과 협업 모델이 한층 다양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생산과 개발, 플랫폼과 파이프라인을 분리해 전문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산업 구조가 재편된다면, 대형사뿐 아니라 중소 바이오벤처에도 기회가 열릴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산업계는 순수 CDMO로 거듭난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신약 개발 플랫폼을 강화하는 삼성에피스홀딩스가 글로벌 시장에서 어떤 성과를 낼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