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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항암주사 확산”…피하제형, 美 승인 러시로 정맥요법 흔든다

한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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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제 투여 방식이 정맥주사 중심에서 피하주사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이 가속하는 모습이다. 미국에서 잇따라 피하주사 제형 항암제가 허가를 받으면서 투여 시간은 수시간에서 수분대로 줄고, 인퓨전 센터와 대형 병원에 집중됐던 항암치료 인프라도 외래·의원급으로 분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의료진 입장에선 병상 효율을 높이고 인력 부담을 줄일 수 있어 향후 항암 시장 전반의 치료 패턴을 바꿀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유한양행 폐암 치료제 렉라자와 병용하는 존슨앤드존슨의 리브리반트 피하주사 제형 리브리반트 파스프로가 17일 미국 식품의약국 FDA 승인을 획득했다. EGFR 변이 비소세포폐암을 대상으로 한 유일한 피하주사 EGFR 표적 치료제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기존 정맥주사 리브리반트와 동일한 기전과 효능을 유지하면서도 투약 환경을 대폭 간소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피하주사는 피하조직의 지방층에 약물을 주입해 체내로 흡수시키는 방식으로, 혈관 확보가 필수인 정맥주사보다 시술이 간단하고 준비 과정도 짧다. 리브리반트 파스프로의 경우 정맥주사 대비 투여 시간이 몇시간에서 5분 수준으로 줄었고, 투여 관련 반응 발생률도 피하주사 13퍼센트, 정맥주사 66퍼센트로 약 5배 차이를 보였다. 정맥혈전색전증 발생률 역시 피하주사 쪽이 더 낮게 나타나 안전성 측면의 이점도 제시됐다.

 

의료현장에선 이러한 변화가 환자 경험 개선으로 직결될 수 있다는 기대가 크다. 조엘 파티 J&J 최고 의료 전달 책임자는 긴 주입 시간이 줄어들면 환자와 보호자가 치료에 묶여 있는 시간을 줄이고 일상생활에 더 집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니 응우옌 시티 오브 호프 종양내과 조교수도 정맥주사와 동등한 치료 효과를 유지하면서 환자 중심의 경험을 제공하는 새로운 피하 치료 옵션이 생겼다고 평가했다.

 

피하 항암제 확산의 배경에는 제형 기술 고도화와 병원 인프라 부담이 겹쳐 있다. 바이오의약품은 분자량이 크고 점도가 높아 피하주사로 투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제형 설계와 전달 기술이 발전하면서 고농도 제형을 짧은 시간에 주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동시에 항암 환자 증가와 고령화로 인한 인퓨전 센터 포화 문제가 심각해지자, 병원들은 처치 시간을 줄이고 외래·지역 병원으로 분산할 수 있는 방식을 선호하는 흐름이다.

 

국내 기업 기술이 반영된 피하 항암제도 미국에서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알테오젠의 플랫폼 기술이 적용된 MSD의 피하 면역항암제 키트루다 큐렉스는 9월 FDA 허가를 받았다. 30분 정맥주사 투여가 필요했던 기존 키트루다와 달리, 피하주사 제형은 3주마다 1분, 6주마다 2분 주사라는 두 가지 옵션으로 제공된다. 이로써 동일 약물을 두고도 환자 상황과 의료기관 환경에 맞춰 투여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여지가 넓어졌다.

 

키트루다 큐렉스와 같은 피하제형은 정맥 접근을 위한 준비, 주입 라인 세팅, 모니터링 장비 등 여러 세팅이 필요한 정맥주사와 달리 소규모 외래나 의원급에서도 투약이 가능하다는 점이 강점이다. 미국 내 인퓨전 센터 중심이었던 항암 투약 구조가 지역 커뮤니티 병원과 클리닉으로 분산될 경우, 환자의 이동 거리와 대기 시간도 줄어들 수 있다. 병원 입장에서는 고가 인프라와 전문 인력을 복잡한 처치가 필요한 환자에게 집중 배치할 수 있어 운영 효율 향상 효과도 기대된다.

 

글로벌 빅파마의 움직임 역시 피하 항암제 전환이 단발성 트렌드가 아니라 구조적 변화임을 보여준다. 미국 BMS는 지난해 12월 면역항암제 옵디보의 피하주사 제형 옵디보 큐반티그를 미국에서 승인 받았다. 로슈는 면역항암제 티쎈트릭의 피하주사 제형을 미국에서 폐암, 간암, 피부암 등 기존 적응증 전반에 허가 받으며 라인업을 넓혔다. 동일 기전의 약물을 정맥주사와 피하주사 두 형태로 병행 운영하는 전략을 통해 환자별 맞춤 투여를 내세우는 양상이다.

 

피하 복합제도 의료 자원 효율화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로슈의 유방암 복합제 페스코는 허셉틴과 퍼제타 두 개의 정맥주사를 하나의 피하주사로 결합한 제품으로, 지난해 국내 보험급여 출시 이후 대형 병원의 주입실 회전율을 높이고 의료진 처치 시간을 줄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두 제제를 개별 정맥주사로 맞을 때보다 투여와 관찰에 소요되는 총 시간이 줄어들면서, 환자 체류 시간과 병상 점유율도 함께 감소하는 구조다.

 

전문가들은 피하 항암제가 병원 중심 항암치료의 구조적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미국과 같이 인건비가 높고 인퓨전 센터 가동률이 이미 상한에 가까운 시장에서 피하 제형 전환은 비용 절감과 수익 구조 개선을 동시에 노린 전략으로 읽힌다. 다만 피하주사 제형이 정맥주사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환자 상태와 병용요법, 약동학 특성에 따라 병행 운용되는 형태가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도 나온다.

 

규제 측면에선 피하제형 항암제도 독립적인 임상 데이터와 안전성 평가를 요구받고 있다. 정맥주사와 동일 성분이라 하더라도 제형과 투여 경로가 달라지면 흡수 속도와 혈중 농도 곡선이 바뀌기 때문에 약동학과 면역 관련 이상반응 패턴을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FDA는 정맥주사 대비 비열등성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허가를 내주고 있으며, 투여 관련 반응과 주사 부위 이상반응 등 실사용 데이터 축적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건강보험 급여 기준과 수가 구조가 피하제형 확산의 핵심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맥주사 기반으로 설계된 입원·외래 수가 체계가 피하주사의 시간 단축과 장소 분산 효과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면, 의료기관이 실제 도입에 소극적일 수 있어서다. 환자 측면에선 병원 방문 횟수와 체류 시간, 교통비 부담이 줄어드는 만큼, 장기적으로는 비용 대비 효용이 커질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결국 피하 항암제 확산은 제형 기술, 병원 인프라, 보험·수가 제도, 환자 경험이 맞물리며 나타나는 구조 변화에 가깝다. 유럽과 미국에서 이미 피하제형 전환 경쟁이 본격화된 가운데, 국내에서도 정맥주사 중심 치료 패턴을 어떻게 재설계할지에 따라 항암치료 효율과 환자 삶의 질이 갈릴 수 있다. 산업계는 피하 항암제가 실제 임상 현장에 얼마나 빠르게 안착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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