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해지기 전에 늙어가고 있다”…EBRD, 신흥 유럽 성장 둔화 경고와 대응 촉구
현지시각 기준 25일, 영국(UK) 런던에 본부를 둔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이 연례 보고서를 통해 인구 고령화가 회원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제약하는 구조적 위험으로 부상했다고 경고했다. 이번 분석은 특히 신흥 유럽 지역의 1인당 GDP 증가세가 2050년까지 뚜렷이 둔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담으며, 각국 정부의 장기 성장 전략 수정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EBRD는 보고서에서 인구 증가 속도 둔화가 장기적인 경제 성장 잠재력을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은행 분석에 따르면 신흥 유럽 국가들에서는 노동 연령층 축소가 이미 성장률에 부담을 주기 시작했으며, 2023년부터 2050년까지 1인당 GDP 연간 증가율이 매년 평균 약 0.4%포인트씩 낮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보고서는 “회원국 정부가 지금부터 구조적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경우 성장 둔화가 고착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베아타 야보르치크 EBRD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동유럽 등 구 공산권 중심 신흥 유럽의 상황을 “부유해지기 전에 늙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들 국가의 중위 연령이 이미 37세에 도달했음에도 평균 1인당 GDP가 약 1만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중위 연령 37세였던 1990년대 선진국들의 평균 1인당 GDP와 비교하면 현재 신흥 유럽의 소득 수준은 약 4분의 1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내놨다.
EBRD는 회원국 대부분이 출산율 제고를 위해 현금 지원, 세제 혜택, 육아 지원 확대 등 각종 인센티브 정책을 도입해 왔지만, “보상 중심의 출산 장려책만으로 출산율을 유의미하게 반등시키고 그 효과를 지속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고 평가했다. 이미 저출산이 고착화된 사회에서는 경제적 보상만으로 결혼과 출산에 대한 가치관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인구 감소에 대응하는 또 다른 축으로 거론되는 이민 확대에 대해서도 보고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많은 지역에서 적극적인 이민 정책에 대한 정치적 수용성이 낮고, 사회적 갈등 우려가 커 이민을 통해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제약 요인으로 인해 유럽 내에서 이민이 인구 구조 문제를 단기간에 완화할 해법이 되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최근 각국이 주목하는 인공지능(AI) 도입 역시 노동력 부족 보완과 생산성 제고 수단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EBRD는 기대만큼 빠른 확산을 낙관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다수 주민이 AI 기술에 대해 일자리 대체 우려와 효율성 기대를 동시에 갖는 ‘양면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사회적 불안이 기술 도입 속도를 제약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AI가 인력 공백을 메우는 데 기여하더라도 고령화로 인한 성장 둔화를 전면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야보르치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현실적인 대응책으로 고령층의 노동시장 참여를 확대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고령화에 따른 성장률 하락을 완화하기 위해 “더 오래 일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며 정년 연장과 단계적 은퇴 확대 등 정책을 언급했다. 다만 단순히 퇴직 시점을 늦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기술 변화에 맞춘 직무 재교육과 평생학습 지원을 통해 고령층의 생산성을 유지·제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또한 연금 제도 개편을 통해 고령층이 노동시장에 남을 유인을 높이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조기퇴직을 장려하는 연금 구조를 손질하고, 더 오래 일할수록 연금 수급액이 늘어나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할 경우 노동 참여가 확대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EBRD는 이러한 노동시장·연금 개혁이 고령화 충격을 완화하는 핵심 축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신흥 유럽 국가들은 과거 빠른 성장과 구조 개혁을 통해 소득 수준을 끌어올렸지만,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본격화되면서 성장 모델 전환 압박에 직면해 있다. EBRD의 이번 경고는 단기 경기부양보다 교육, 기술, 노동시장 개혁 등 장기적 경쟁력 확보 전략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국제사회는 각국이 고령화 속도와 정치·사회 여건에 맞춘 맞춤형 대응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