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외교 내세운 정부, 50개국과 기술동맹 논의 주도
첨단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정부가 과학기술외교를 국가 전략의 전면에 내세우고 다자 협력 채널을 확대하고 있다. 과학기술을 외교와 안보, 경제정책을 관통하는 축으로 삼아 글로벌 규범 형성과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인공지능, 첨단 바이오, 양자, 에너지 기술이 국제 협력과 규제 논의의 핵심 의제로 부상한 만큼, 이번 포럼이 한국형 과학기술외교 모델을 구체화하는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외교부는 9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2025 K-사이언스 & 테크놀로지 글로벌 포럼을 공동 개최했다. 이번 행사에는 약 50개국 90여 명의 주한외교단을 비롯해 국회와 정부 관계자, 유관기관장, 국내외 연구자, 해외 과기정통 주재관 등 200여 명이 참석해 과학기술 국제협력 성과와 향후 전략을 논의했다. 양 부처가 지난해에 이어 연속으로 공동 주최에 나선 것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첨단기술 중심 과학기술외교의 위상을 제도화 단계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포럼은 기조연설과 네 개 세션으로 구성됐다. 1세션에서는 과기정통부와 외교부가 과학기술 국제협력 및 과학기술외교 정책 방향을 공유했고, 2·3세션에서는 신규 다자협력 플랫폼과 연구안보의 구체적 추진 방안이 다뤄졌다. 마지막 4세션은 대표 국제협력 사업들의 성과 공유와 확장 전략에 초점을 맞췄다. AI, 양자, 사이버보안, AI-바이오 융합 연구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소개되면서, 단순 학술교류를 넘어 기술동맹 수준의 협력 모델을 모색하는 분위기가 두드러졌다는 평가다.
기조연설은 생물물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하택집 하버드대 교수가 맡았다. 그는 From Biophysics to Global Impact를 주제로, 글로벌 연구 파트너십과 연구계·산업계 간 연계를 과학기술 혁신의 핵심 동력으로 제시했다. 특히 우수한 신진 연구인력 양성과 국가 간 공동연구 인프라 확충이 장기적인 기술 경쟁력의 기반이라고 지적하며, 바이오 물리학과 같은 기초 연구가 궁극적으로 신약개발, 헬스케어, 에너지 전환 등 산업 전반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강조했다.
세션 1에서 황성훈 과기정통부 국제협력관은 과학기술외교 강화를 위한 국제협력 촉진 전략을 발표했다. 그는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에서 개방과 보호의 균형을 바탕으로 전략적이고 실용적인 국제협력을 추진해 기술주권을 확보하겠다고 제시했다. 이는 핵심 기술의 대외 의존도를 관리하면서도, AI와 첨단 바이오, 양자 컴퓨팅 같은 분야에서는 선도국과의 공동연구와 인력 교류를 공격적으로 확대해 혁신 속도를 높이는 투트랙 접근으로 풀이된다.
이어 한민영 외교부 기후환경과학외교국장은 기술패권 경쟁과 대한민국 과학기술외교 전략을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첨단기술 중심 과학기술외교의 전략적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며, 신흥기술 분야에서 국제 규범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기후기술, 에너지 전환, 디지털 전환과 관련된 국제 논의 체계에서 한국이 중견 기술국으로서 조정자 역할을 수행할 여지가 크다고 진단하며, 이를 위해 외교 채널과 연구 네트워크를 정밀하게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세션 2에서는 구본경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장이 신규 다자협력 플랫폼 구축을 통한 혁신창출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글로벌 공동 문제 해결과 최정상급 기초과학 연구 선도를 위해, 연구자 주도의 상시 협력 네트워크와 공동 인프라 구축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뒤이어 고기성 중앙대 교수를 좌장으로 안드레아스 하인리히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장, 사사키 미사오 아태물리센터 소장 등 다자협력 전문가들이 패널토론을 진행했다. 이들은 기존 양자·소규모 협력 틀만으로는 AI, 양자, 기후과학, 감염병 대응 등 복합 이슈에 대응하기 어렵다며, 다자 플랫폼을 통한 데이터 공유, 공동 장비 활용, 인력 순환 프로그램 확대의 필요성을 짚었다.
세션 3에서는 신뢰 기반 과학기술 국제협력을 위한 연구안보를 핵심 의제로 다뤘다. 선인경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외 연구안보 정책 동향을 소개하며, 기술유출 방지와 개방형 과학 생태계 유지 사이에서 정책 조율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카타지 스미스 OECD 글로벌과학포럼 선임정책분석가와 요시다 카즈히사 일본 내각부 국제그룹기획관이 OECD와 일본의 연구안보 정책 방향을 공유했다. 두 발표는 다자협력체가 연구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전략기술 보호를 위한 공통 규범을 설계하려는 흐름을 보여주며, 국가별 제도 정합성 확보가 향후 협력의 관건이 될 것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김국태 KAIST 선임연구원은 연구안보의 중요성과 대학 차원의 대응 방안을 발표했다. 그는 대학이 국제 공동연구의 최전선인 동시에, 기술유출과 규범 위반 리스크에 가장 노출된 공간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연구 윤리 교육, 데이터 접근 권한 관리, 공동연구 계약 단계에서의 안보 검토 체계 구축 등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패널토론에서는 오태석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원장이 좌장을 맡아, 국제협력을 촉진하면서도 과도한 규제가 혁신을 저해하지 않도록 하는 균형 있는 연구안보 방향을 놓고 논의가 이어졌다.
세션 4에서는 정부가 추진해 온 과학기술 국제협력 대표 사업들의 구체적 성과가 공유됐다. 탑티어 국제협력 플랫폼, 한베트남 양자 협력, 글로벌 AI 프론티어 랩, 양자사이버보안 원천기술 국제협력, AI-바이오 융합 글로벌 공동연구 등이 주요 사례로 제시됐다. 연구책임자들은 공동연구 성과와 함께, 인력 교류, 공동 특허, 국제 공동연구센터 설립 등 가시적 결과를 소개하며 향후 확장 계획을 밝혔다. 특히 AI와 바이오를 결합한 글로벌 협력 연구는 신약개발, 정밀의료,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창출로 이어질 가능성에 주목받았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정통부 장관은 첨단과학기술이 국가의 경제, 외교, 안보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고 평가하면서, 앞으로 AI, 첨단바이오, 양자, 에너지 등 핵심 기술 분야의 국제협력을 전략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국제협력 연구 생태계를 활성화해 대한민국이 과학기술 글로벌 혁신 허브로 도약할 수 있도록 정책과 예산, 인프라를 연계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은 기술 경쟁력이 국가의 외교 지형과 동맹 네트워크, 글로벌 규범의 방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고 진단했다. 외교부가 과기정통부와 긴밀히 협력해 기술혁신을 대한민국 외교역량의 핵심 축으로 세우고, 동맹과 우방, 중견국을 잇는 다층적 과학기술외교 네트워크를 한층 강화하겠다는 계획도 제시했다. 산업계와 학계에서는 이번 포럼을 계기로 과학기술외교를 둘러싼 정책과 협력 구조가 보다 구체화될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