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대북정책 협의 주체는 통일부"…한미 외교당국 협의체 불참 선택

조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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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정책을 둘러싼 주도권을 놓고 통일부와 외교부가 맞붙었다. 미국과의 정례 대북정책 협의체를 계기로 양 부처 간 기싸움이 노출되면서,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조정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커지고 있다.

 

통일부는 12월 15일 한미 외교당국이 이르면 16일 열기로 한 정례적 성격의 정책 협의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신 남북대화와 교류협력 등 대북정책에 관해서는 필요에 따라 미국 측과 별도로 협의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통일부는 이날 배포한 한미 협의체 관련 입장에서 "이번에 외교부가 진행하는 미측과의 협의는 조인트 팩트시트의 후속 협의에 대한 내용으로 알고 있으며 한미 간 외교 현안 협의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통일부는 불참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번 회의가 외교 현안 중심이어서 통일부가 참여할 성격이 아니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통일부는 이어 "동맹국으로서 필요시 국방정책은 국방부가, 외교정책은 외교부가 미국과 협의하고 있으며 남북대화, 교류협력 등 대북정책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필요시 통일부가 별도로 미측과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북정책과 관련해 유관 부처 및 한미 간 긴밀히 협의한다는 통일부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덧붙였다.

 

한미가 준비 중인 이번 정례 협의에는 정연두 외교부 외교전략정보본부장과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가 수석대표로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양측은 북한 문제 전반을 논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져 통일부의 참여가 예상됐으나, 통일부는 내부 검토 끝에 불참 결정을 내렸다.

 

그 배경에는 문재인 정부 때 가동됐던 한미 워킹그룹에 대한 뼈아픈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워킹그룹은 남북경협과 인도적 지원 사업을 미국과 사전 조율하는 창구로 운영됐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제재 논의를 우선시하는 통로로 기능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통일부 관계자는 "외교부가 밝힌 계획대로라면 한미 외교 당국 정례 협의는 대북정책 전반을 다루게 되는데, 이 경우 현실적으로 워킹그룹처럼 운영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낮은 급의 참여도 고려했으나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외교부 주도의 정례 협의체가 사실상 대북정책 총괄 기구로 비칠 소지가 있다고 본 셈이다.

 

통일부 내부에서는 외교 당국 중심의 협의체가 한미 워킹그룹의 재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남북관계의 속도와 방향을 우리 정부가 주도하기 어렵게 되고, 제재와 동맹 조율 논리 아래 남북 교류협력 창구가 다시 좁아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최근 같은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정 장관은 12월 10일 기자간담회에서 "한반도 정책, 남북관계는 주권의 영역이고, 동맹국과 협의의 주체는 통일부"라고 말했다. 그는 외교당국 간 대북정책 정례 협의 구상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분명히 하며, 대북정책의 컨트롤타워가 통일부여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정책 경험이 풍부한 전직 장관들도 거들고 나섰다. 진보 성향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임동원, 정세현, 이재정, 조명균, 김연철, 이인영 등 6명은 이날 공동 성명을 통해 한미 외교당국 정례 협의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제2의 한미 워킹그룹을 반대합니다라는 제목의 입장문에서 "전문성이 없고, 남북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교부에 대북정책을 맡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전·현직 통일라인의 집단 반발은 대북정책 협의의 형식과 내용뿐 아니라, 협의의 주체를 둘러싼 상징적 의미까지 걸려 있기 때문이다. 통일부가 남북관계의 전담 부처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외교부 중심 협의체가 사실상 대북정책의 무게중심을 외교·안보 라인으로 재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경계심도 읽힌다.

 

외교부는 한미 간 외교 현안 협의 차원의 회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나, 통일부와 전직 장관들은 대북정책 전반을 다루는 형식이 될 경우 남북관계의 정책 자율성이 다시 제약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워킹그룹 체제가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통일부 안팎에서 나오는 이유다.

 

대북정책 협의 주체를 둘러싼 갈등이 장기화될 경우, 한미 공조의 효율성과 대북 메시지의 일관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야권 일각에서는 국가안보실이 컨트롤타워 역할을 분명히 하고, 통일부와 외교부, 국방부 간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오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한미 대북정책 공조 틀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갈등이 분출할 가능성도 주시하고 있다. 통일부와 외교부가 협의 구조를 놓고 대립 각을 세운 만큼, 청와대와 국회가 관련 현안을 놓고 본격 논의에 나설 경우 부처 간 역할 조정과 제도적 장치 마련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조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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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외교부#한미워킹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