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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늘었지만 R&D는 줄었다…국내 제약사, 임상투자 전략 수정 주목

강민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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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 임상 혁신의 핵심인 연구개발 투자 흐름에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국내 제약사가 2024년 30조원을 넘는 매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매출 대비 연구개발 비중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분석이다. 특히 임상시험은 항암제와 초기 단계 중심으로 쏠리고, 실제 수행 인력과 인프라는 CRO와 일부 기관에 집중되는 구조가 강화되고 있어 산업 내 양극화 우려도 나온다. 업계에서는 이를 글로벌 임상 경쟁에서의 분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커지고 있다.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이 수행한 2025년 임상시험 산업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제약기업 185개사의 총 매출액은 31조5281억원으로 추정됐다. 전년 매출 25조4235억원과 비교하면 외형 성장은 뚜렷하다. 반면 같은 기간 R&D 비용은 4조99억원에서 3조9121억원으로 약 2.4퍼센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 비중으로는 15.8퍼센트에서 12.4퍼센트로 하락했다.

조사 대상 기업은 최근 3년간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임상시험계획 IND 승인을 받은 국내 제약사다. 조사 표본이 173곳에서 185곳으로 늘었음에도 R&D 총액이 줄어든 점이 특징이다. 매출 3000억원 이상 제약사의 95.8퍼센트가 연간 100억원 이상을 R&D에 쓰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보수적 투자 기조가 강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기업 유형별로 보면 일반제약사와 바이오벤처의 전략 차이가 뚜렷하다. 일반제약사는 매출 대비 R&D 비중이 9.8퍼센트, 평균 R&D 비용이 310억원 수준으로 나타났다. 반면 바이오벤처는 매출 대비 R&D 비중이 45.6퍼센트에 달했지만 평균 비용은 114억원으로 상대적으로 작았다. 매출 규모가 크지 않은 바이오벤처가 높은 비율을 R&D에 투입하며 기술 기반 성장에 집중하는 반면, 전통 제약사는 수익성 관리와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구조로 읽힌다.

 

임상시험 단계별 수행 건수에서도 전략이 갈렸다. 전체 제약사 기준으로는 1상 비중이 37.2퍼센트로 가장 높고, 2상이 17.6퍼센트,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이 15.2퍼센트 순으로 집계됐다. 일반제약사는 1상 27.4퍼센트,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 26.3퍼센트에 집중해 개량신약과 제네릭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반면 바이오벤처는 1상 49.6퍼센트, 2상 27.4퍼센트 등 초기 임상에 강하게 쏠려 있어 신약 후보의 안전성과 개념증명에 자원을 집중하는 모습이다.

 

적응증별로는 항암제와 심혈관계, 내분비계 질환 중심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전체 임상시험 중 항암제 비중은 18.1퍼센트로 가장 높았다. 이어 심혈관계 11.7퍼센트, 내분비계 10.7퍼센트 순이다. 일반제약사는 심혈관계 17.2퍼센트, 내분비계 15.5퍼센트 비중이 높아 만성질환 중심의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바이오벤처는 항암제 24.5퍼센트, 중추신경계 질환 17.2퍼센트에 집중하면서, 고위험·고수익 영역을 겨냥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특히 항암제는 글로벌 빅파마와의 라이선스 아웃, 공동개발 협상에서 가치 평가가 높은 분야라 국내에서도 경쟁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임상시험을 실제로 수행하는 인력 구조를 보면, 내실 강화와 동시에 병목 우려도 함께 드러났다. 지난해 국내 제약사 임상 관련 인원은 2114명으로, 전체 임직원 3만3026명의 6.4퍼센트, 전체 R&D 인력 6044명의 35퍼센트를 차지했다. 임상 직무별 구성은 PM 프로젝트 매니저 30.2퍼센트, RA 규제 업무 담당 22.8퍼센트, CRA 모니터 요원 7.9퍼센트 순으로 조사됐다. 일반제약사는 RA 비중이, 바이오벤처는 PM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 각각 허가 전략과 프로젝트 기획·관리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운용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임상시험 위탁을 맡는 국내 CRO 71개사는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 기업의 지난해 매출액은 9835억원으로 추정되며, 서비스 포트폴리오의 90.9퍼센트가 임상시험 운영과 데이터 관리에 집중돼 있다. 세부 서비스 중 매출 비중은 기관 관리 및 모니터링이 19.4퍼센트로 가장 높았다. 인력은 총 7193명으로, 이 중 CRA가 27.1퍼센트, 데이터 관리 담당 DM이 11.8퍼센트를 차지했다. 특히 IND 미승인 연구자 주도 임상시험 비중이 23.4퍼센트로 가장 높고 항암제 비중도 25.8퍼센트에 달해, 병원 주도 연구와 초기 탐색 단계 수요가 CRO 성장의 동력이 되고 있는 구조다.

 

임상시험실시기관 68곳의 인력 규모는 총 9024명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연구책임자 PI 비중이 42.5퍼센트로 높게 나타나, 의사 연구자 중심의 연구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임상 단계별 수행 건수는 시판 직전 최종 검증 단계인 3상이 33.5퍼센트로 가장 많았고, 효능군별로는 심혈관계 질환이 21.7퍼센트로 비중이 컸다. 전체 기관의 55.9퍼센트는 임상시험 계약 규모가 전년 대비 증가했다고 답해, 실무 현장에서는 임상 수요가 계속 확대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바이오텍과 빅파마가 고위험 혁신 파이프라인에 대한 투자를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매출 성장에도 R&D 비중이 낮아진 만큼, 대형 제약사의 투자 전략이 다소 보수적으로 전환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뒤따른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인공지능 기반 후보물질 발굴, 적응증 확장 전략, 병원·데이터 플랫폼과의 연계 등 임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가 경쟁력의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책·제도 측면에서도 과제가 적지 않다.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제도적 지원 부족, 해외 시장과의 경쟁력 격차, 인프라 보유 여부에 따른 수행 여건 차이를 주요 문제로 짚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임상시험 인프라가 수도권과 대형병원, 일부 CRO에 편중돼 있고, 규제와 행정 절차도 글로벌 스탠더드 대비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IND 사전 상담 체계, 데이터 표준화, 환자 모집을 지원하는 디지털 플랫폼 등도 정비가 필요한 영역으로 꼽힌다.

 

업계와 전문가들은 앞으로 정부의 임상 인프라 투자와 규제 혁신 방향에 따라 국내 제약사의 R&D 전략이 다시 조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재단 관계자는 정확한 현황 진단을 바탕으로 한 전략적이고 실행 가능한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산업계는 매출 성장과 R&D 축소 사이의 괴리가 장기화할지, 아니면 임상 생태계 재편과 함께 새로운 투자 사이클로 이어질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강민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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