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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다 위 돌성 한 채”…거제에서 찾는 자연과 건축의 공존

장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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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겨울바다를 보러 거제로 향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휴가철에만 찾는 피서지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차분한 바다와 색다른 건축물을 함께 즐기는 사계절 여행지의 일상이 됐다. 사소한 동선 하나에도 취향을 담는 여행자들은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 물 위를 나는 돌고래, 돌로 쌓아 올린 성벽 같은 장면을 천천히 수집하며 자신의 속도를 찾는다.

 

거제의 첫 장면은 몽돌 해변에서 시작된다. 일운면 망치리의 오션뷰 카페 마소마레에서는 유리창 너머로 몽돌 해수욕장을 가득 채운 파도가 눈앞까지 밀려온다. 모래 대신 둥근 자갈이 부딪히며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힌다. 루프탑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면 잔잔한 겨울 햇빛이 수면에 반사돼 반짝이고, 야외 빈백에 몸을 묻은 사람들은 뜨거운 커피 대신 따뜻한 시그니처 음료를 천천히 식혀 마신다. 그만큼 이곳에서의 시간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가깝다. 소형견을 품에 안고 창가 자리에 앉은 여행자는 “멀리 떠난 것 같지 않은데, 마음은 먼 데까지 다녀온 것 같다”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출처=한국관광공사 매미성
출처=한국관광공사 매미성

이런 감각을 품은 채 조금 더 내려가면, 거제씨월드에서 또 다른 바다를 만난다. 일운면 소동리에 자리한 이 아쿠아리움은 벨루가와 돌고래가 살아가는 수중 세계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두꺼운 수조 유리 너머로 천천히 헤엄치는 벨루가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손바닥을 유리에 대고 한참을 떨어질 줄 모른다. 해양 생태 설명을 곁들인 프로그램을 듣다 보면, 단순한 구경이 아니라 함께 사는 존재에 대한 이해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돌핀 야외활동 관찰 후 이어지는 포토타임은 가족 단위 여행객에게 특별한 한 장면을 남긴다.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긴 것은 몇 초의 사진이지만, 바다 생명과 마주 본 시간은 그보다 오래 마음속에 남는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각 지방자치단체와 관광 관련 기관 통계에 따르면 가족 단위 체험 여행 수요는 해마다 꾸준히 늘고 있고, 단순 관광보다 생태와 교육을 겸한 코스를 찾는 비율도 높아지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보는 여행에서 배우는 여행으로의 이동”이라 설명한다. 아이와 함께하는 부모들은 수조 앞에서 “교과서에서 보던 동물을 실제로 보니 이해가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혼자 여행을 온 성인은 “어릴 땐 쇼처럼만 느꼈는데, 이제는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이 먼저 떠오른다”고 고백한다.

 

거제의 풍경은 높이에서도 새로워진다. 동부면 구천리에서 노자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거제파노라마 케이블카는 바다와 산의 경계를 부드럽게 잇는다. 약 1.56km를 미끄러지듯 올라가는 동안 발아래로는 계절의 색을 입은 숲이 펼쳐지고, 시야 끝에는 다도해가 겹겹이 포개진다. 상부 윤슬정류장 전망대에 오르면 이름 그대로 물결 위로 부서지는 햇빛이 은빛 윤슬을 만들고,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바다가 시야를 채운다. 바닥이 유리로 된 크리스탈 캐빈을 선택한 여행자는 “하늘과 바다 사이에 매달린 기분”이라며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높이에 놀라며 다시 수평선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이 잠시 비워진다.

 

하부 사계정류장과 윤슬정류장에 마련된 카페와 푸드코트는 이동 중에도 쉼을 허락한다. 따뜻한 음료를 들고 창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막 지나온 케이블카 선로를 따라 눈길을 보낸다. 계획 없이 들른 여행자도 “코스가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하루 동선이 편했다”고 표현한다. 이동과 휴식, 관람과 체험이 느슨하게 섞인 흐름은 바빠야만 알차다고 믿던 여행의 공식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거제에서 가장 이색적인 장면은 바다 위에 세워진 돌성에서 완성된다. 장목면 대금리의 매미성은 2003년 태풍 매미 이후,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 한 개인이 차곡차곡 돌을 쌓아 올려 만든 해변 석성이다. 손바닥만 한 돌부터 사람 키 높이의 바위까지, 불규칙하지만 단단하게 맞물린 돌들은 마치 오래된 유럽 성채를 연상시킨다. 다만 그 배경에는 화려한 왕실의 역사가 아니라, 집과 삶을 지키고자 했던 한 사람의 절실함이 깔려 있다.

 

성벽 곳곳에 뚫린 작은 창문 사이로는 푸른 바다와 주변 섬들이 액자처럼 들어온다. 많은 이들이 이 창문 앞에 서서 사진을 남긴다. 누군가는 해질 무렵 수평선을 등지고 실루엣을 남기고, 또 다른 이들은 가족의 뒷모습을 조용히 담아간다. 그만큼 매미성은 거친 바다를 막기 위해 쌓인 방벽이면서도, 지금은 여행자들에게 가장 오래 머무는 포토 스폿이 됐다. 한 여행자는 “태풍을 견디려고 쌓은 성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길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 같다”고 느꼈다.

 

전문가들은 이런 공간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가 있는 장소에 끌리는 심리”라고 설명한다. 단정하고 완벽한 관광지보다, 누군가의 사연과 손길이 배어 있는 풍경에서 사람들은 위로를 발견한다. 돌이 조금 비뚤게 얹혀 있어도, 성벽이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지 않아도, 그 안에서 삶을 버텨낸 흔적이 보일 때 오히려 더 단단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진을 찍는 손놀림도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워진다. 잠시 빌린 이야기 속에 자신도 함께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여행 커뮤니티마다 “거제 가면 어디부터 가야 할까”라는 질문에는 바다 전망이 좋은 카페와 해양 생태 체험, 케이블카, 매미성이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겨울이라 더 좋았다”, “사람이 많지 않아 관계에 지치지 않고 바다와 나만 있는 기분을 느꼈다”는 후기들이 이어진다. 가족 여행객은 아이와 함께한 체험 프로그램을, 연인은 케이블카에서 본 석양을, 혼자 떠난 여행자는 매미성 앞에서 느꼈던 묵직한 감정을 오래 회상한다.

 

자연과 건축이 만나는 거제의 풍경은 여행의 목적도 바꾸고 있다. 과거처럼 빠르게 여러 곳을 찍고 지나가는 방식보다, 한두 곳에 오래 머물며 건물과 바다, 그 안의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중이다. 오션뷰 카페에서 시작해 해양 생태를 마주하고, 산과 바다를 동시에 내려다본 뒤, 태풍의 흔적이 남은 돌성 앞에 서는 하루의 동선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한 장면씩 차곡차곡 쌓인다.

 

거제에서의 여행은 화려한 이벤트보다 일상의 결을 다시 느끼게 하는 경험에 가깝다. 파도가 몽돌을 굴리는 소리, 수조 속 벨루가의 천천한 숨, 공중에서 내려다본 다도해의 곡선, 누군가가 오랜 시간 쌓아 올린 돌성의 온기까지. 작고 사소한 장면들이 모여 삶의 리듬을 조금씩 바꾼다. 지금 이 변화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본 ‘조용히 나를 돌보는 여행’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결국 중요한 건, 어디로 가느냐보다 그곳에서 얼마나 나답게 머무를 수 있느냐일 것이다.

장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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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성#거제씨월드#거제파노라마케이블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