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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버린 AI 인프라 앞세운 통신사들…SKT, A.X K1로 국산 초거대 승부수

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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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버린 인공지능 시대를 앞두고 통신사가 핵심 인프라 제공자로 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가 장악한 하이퍼스케일 클라우드와 정면승부하기보다, 자국 내 데이터 주권과 규제를 충족하는 로컬 인프라를 구축해 산업 전반의 AI 전환을 뒷받침하는 전략이다. 네트워크와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운영 역량을 함께 보유한 통신사가 AI 워크로드를 위한 최적의 실행 기반으로 평가되면서, 이들의 역할이 단순 회선 사업자를 넘어 국가 단위 소버린 AI 구현의 핵심 축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의 수석 컨설턴트 에드윈 린은 최근 아시아태평양 지역 통신사의 전략 변화를 분석하며 싱텔, 차이나텔레콤, SK텔레콤을 대표 사례로 제시했다. 그는 이들 통신사가 하이퍼스케일러와 유사한 플랫폼 경쟁보다는, 각국 데이터 정책과 산업 구조에 부합하는 AI 인프라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포지셔닝을 조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버린 AI 구현에 필요한 컴퓨팅, 저장, 네트워크를 한데 묶어 제공하는 구조가 기업과 공공 부문의 수요를 동시에 흡수하고 있다는 평가다.

싱가포르의 싱텔은 자회사 NCS를 통해 기업 대상 AI 컨설팅 및 구축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또 다른 자회사 Nxera를 통해 AI 최적화 차세대 데이터센터 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Nxera 데이터센터는 고밀도 GPU 배치와 저지연 네트워크 설계를 특징으로 하며, APAC 전역의 하이퍼스케일러와 대형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AI 워크로드에 특화된 환경을 제공한다. 싱텔은 이 플랫폼을 통해 특정 클라우드 사업자와 경쟁하기보다, 복수의 AI·클라우드 사업자가 기댈 수 있는 기반 인프라로 자리매김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중국 차이나텔레콤은 통신망 자체에 AI를 내장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회사의 시랑 플랫폼은 약 1770억 파라미터 규모의 대형 언어 모델을 약 500킬로미터에 이르는 통신 인프라 전반에 분산 배치해 운영하도록 설계됐다. 이는 GPT 3.5로 알려진 1750억 파라미터 모델보다 큰 수준으로, 1024개의 GPU를 활용해 구동된다. 시랑은 중앙집중형 데이터센터에 모든 연산을 몰아넣는 대신, 전국에 분산된 네트워크 거점에 AI 연산을 배치해 데이터 주권을 유지하면서 지연 시간을 줄이는 구조가 특징이다.

 

차이나텔레콤은 이 분산형 AI 인프라를 스마트공장과 스마트시티, 산업 자동화 등 국가 전략 산업에 적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바이오 스타트업은 분자 시뮬레이션에 시랑을 활용해 기존에 3개월이 걸리던 작업을 하루로 줄였다. 통신 인프라에 AI 연산 능력을 얹은 결과, 대용량 연산을 필요로 하는 R&D 업무의 속도가 비약적으로 향상된 사례로 꼽힌다. 업계에서는 시랑이 중국 국가 초고속 컴퓨팅 네트워크의 일부로 작동하며, AI를 전력이나 통신처럼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유틸리티로 전환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본다.

 

국내에서는 SK텔레콤이 대표적인 소버린 AI 전략 플레이어로 주목받는다. 에드윈 린은 SK텔레콤이 기업 고객을 겨냥해 소버린 AI 클라우드와 서비스형 GPU를 동시에 구축하며, 글로벌 하이퍼스케일러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핵심 AI 워크로드를 국내 데이터센터와 네트워크 내에 두고 직접 운영함으로써 규제 준수와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고, 동시에 제조, 금융, 스마트시티 등 산업별 특화 AI 서비스를 확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SK텔레콤의 소버린 클라우드는 국내 데이터 보호 규정과 컴플라이언스 요건을 충족하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고 있다. 여기에 GPU를 필요에 따라 임대해 쓰는 서비스형 GPU 모델을 결합해, 중견·중소기업도 초기 대규모 설비 투자 없이 고성능 컴퓨팅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다. 하이퍼스케일러의 글로벌 데이터센터에 의존하지 않고도 AI 모델 학습과 추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금융·공공·의료 등 데이터 이전이 까다로운 업종에서 수요가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북미 무선통신 전문 매체 RCR 와이어리스 뉴스도 통신사의 AI 사업 확장에 주목하고 있다. 이 매체는 통신사가 네트워크와 데이터센터를 이미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AI 서비스형 비즈니스에 진입할 수 있는 비용 경쟁력이 높다고 평가했다. 특히 데이터 주권과 규제가 중요한 산업에서는 글로벌 클라우드보다 자국 통신사 기반 인프라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어, 통신사가 기업용 AI 서비스 시장에서 의미 있는 대안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통신사는 또 하나의 역할도 맡고 있다. 여러 AI 벤더의 솔루션을 사전에 검증하고 큐레이션해, 기업 고객이 기술 선택과 운영 리스크를 줄일 수 있게 돕는 것이다. RCR 와이어리스 뉴스는 프랑스 오랑주와 SK텔레콤을 사례로 들며, 이들이 서비스형 GPU와 맞춤형 대형 언어 모델 솔루션으로 가시적인 매출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소개했다. 통신사가 단순 인프라 제공자를 넘어, AI 생태계의 조정자이자 통합 사업자로 진화하는 양상이다.

 

SK텔레콤은 정부가 추진하는 독자 AI 모델 개발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소버린 AI 전략을 기술 레벨에서 강화하고 있다. 회사는 올해 안에 매개변수 5000억 개 이상 규모의 초거대 AI 모델 A.X K1을 공개할 계획이다. 국내에서 상용화된 AI 모델 다수가 수십억에서 수백억 파라미터 수준에 머물러 온 점을 감안하면, 파라미터 수 기준으로 한 단계 도약을 시도하는 셈이다. 대형 모델은 언어 이해와 생성 능력, 멀티태스크 처리 측면에서 우위를 보일 수 있지만, 학습 데이터 품질과 튜닝 전략에 따라 실제 성능이 갈린다는 점도 변수로 거론된다.

 

A.X K1 개발에는 크래프톤, 포티투닷, 리벨리온, 셀렉트스타, 라이너 등 산업별 전문 기업과 서울대, KAIST 연구진이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 중이다. 게임, 모빌리티, 반도체, 데이터 구축, 검색, 멀티모달 AI 등 각 분야의 노하우를 모아, 대화형 서비스부터 자율주행, 영상·음성 인식까지 다양한 도메인에서 활용 가능한 범용 모델을 지향한다. SK텔레콤은 특히 한국어 처리 능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목표로 하면서, 영어를 포함한 다국어와 텍스트·이미지·음성까지 다루는 멀티모달 기능을 탑재하는 구상을 내놨다.

 

업계에서는 통신사가 자체 초거대 모델을 확보하고, 이를 소버린 클라우드와 서비스형 GPU 인프라에 얹어 서비스하는 구조가 국내 AI 산업의 경쟁 구도를 바꿀 수 있다고 본다. 글로벌 빅테크 중심의 클라우드 의존도를 낮추고, 금융·공공·제조 등 규제가 까다로운 분야에서도 대형 언어 모델을 활용할 수 있는 선택지가 넓어질 수 있어서다. 다만 초거대 모델의 개발과 운영 비용, 전력 효율, 데이터 보호와 투명성 확보 같은 과제가 동시에 제기되는 만큼, 기술 고도화와 더불어 제도적 논의도 병행돼야 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소버린 AI를 둘러싼 경쟁이 단순 기술 성능뿐 아니라, 인프라 소유 구조와 규제 대응, 데이터 주권 전략을 포함한 종합전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본다. 통신사가 네트워크와 데이터센터, AI 플랫폼을 결합한 복합 사업자로 진화할 수 있을지에 따라 각국 AI 산업 생태계의 구조도 달라질 수 있다. 산업계는 SK텔레콤을 비롯한 통신사의 소버린 AI 전략이 실제 수익성과 글로벌 경쟁력으로 이어질지 주시하고 있다.

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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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텔레콤#싱텔#차이나텔레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