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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특화반도체에 1조2676억…정부, K반도체 세계투톱 승부수

문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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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디바이스 인공지능 반도체를 축으로 한 K반도체 전략이 정부 차원의 대형 프로젝트로 가동된다. 정부는 메모리 초격차를 유지하는 동시에 AI 특화 시스템반도체에서 새로운 격차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2030년까지 AI 특화반도체 연구개발에만 1조2676억 원을 투입한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글로벌 생산 허브로 키우는 한편 광주와 부산, 구미를 잇는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를 구축해 수도권 중심이던 생산 거점을 전국 단위로 확장하겠다는 복안이다. 업계에서는 메모리 독주에 비해 취약했던 시스템반도체와 소부장, 인력 생태계까지 동시에 손보는 ‘전면 개편 시도’로 보고 있다.

 

산업통상부는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관계부처 합동으로 AI 시대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를 열고, AI 시대 반도체산업 전략을 공식 발표했다. 핵심은 고대역폭메모리 이후 AI 특화 반도체 시장을 선점해 세계 반도체 2강 체제를 굳히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온디바이스 AI 반도체인 NPU와 메모리 안에서 연산을 수행하는 프로세싱인메모리 같은 추론 특화 칩 분야에 국가 연구개발 자원을 집중 배분한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차세대 메모리 분야에도 2032년까지 2159억 원을 따로 투입해 기존 D램과 낸드를 잇는 신규 메모리 기술 조기 상용화를 지원한다.

온디바이스 AI 반도체는 데이터센터나 클라우드 서버가 아니라 스마트폰, 자동차, 공장 설비 등 단말기 내부에서 AI 연산을 처리하는 칩을 가리킨다. 외부 전송 없이 단말기 내에서 연산이 이뤄져 지연 시간이 짧고 개인정보 보호에도 유리하지만, 배터리 용량과 발열 한계 때문에 극단적인 전력 효율이 요구된다. 정부가 NPU와 PIM을 최우선 투자 대상으로 꼽은 배경이다. NPU는 신경망 연산을 병렬로 처리하는 전용 프로세서로, 같은 연산을 CPU보다 훨씬 낮은 전력으로 수행할 수 있다. PIM은 메모리 칩 안에 연산 기능을 통합하는 구조로, 데이터를 메모리와 프로세서 사이에서 반복 이동하는 기존 구조의 병목을 줄여 전력과 속도 모두에서 개선 효과가 기대된다. 정부는 이들 기술이 본격 상용화될 경우 AI 서버부터 모바일과 차량, 사물인터넷까지 전 방위에서 필요한 연산 효율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AI 특화 기술 투자와 더불어 전력 효율과 피지컬 AI의 기반이 되는 화합물 반도체와 첨단 패키징 기술도 전략 분야로 지정했다. 화합물 반도체는 실리콘 대신 탄화규소나 질화갈륨 등의 소재를 활용해 고전압, 고온 환경에서 높은 효율을 구현하는 전력 반도체의 핵심 기술이다. 전기차, 신재생에너지, 데이터센터 전원 장치에서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 첨단 패키징은 여러 개의 칩을 수평 또는 수직으로 적층해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 기술로, 칩 간 연결 거리를 줄여 AI 연산에 필요한 대역폭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칩 설계 미세화 경쟁이 한계에 가까워질수록 패키징 기술이 시스템 성능을 좌우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어, 정부는 이를 차세대 경쟁 축으로 본다.

 

공간 전략 측면에서 정부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기존 생산 거점과 연계해 글로벌 생산 허브로 육성한다. 용인은 대규모 생산공장과 장기적인 전력·용수 수급 계획이 동시에 필요해 민간만으로는 인프라 확보가 어렵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정부는 전력과 용수 같은 핵심 인프라를 국가 책임으로 깔고, 국비를 비롯한 공공부문 지원을 확대해 기업 투자 리스크를 낮추겠다고 밝혔다. 소재와 장비, 설계, 후공정 등 전후방 밸류체인이 집적된 ‘수직 통합형’ 생산 기지로 만들어 글로벌 파운드리와 메모리 수요에 동시에 대응하겠다는 구상이다.

 

상대적인 약점으로 지적돼 온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강화도 전략의 또 다른 축이다. 정부는 팹리스 기업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수요기업이 기술 로드맵을 제시하고 파운드리가 설계와 생산을 밀착 지원하는 협업 생태계를 구축한다. 차량제어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과 전력관리칩 같은 중간 기술 수준의 미들테크 반도체는 국내 수요가 크지만 수입 의존도가 높아 공급망 리스크가 반복돼 왔다. 정부는 이 부문 국산화를 목표로 수요기업과 팹리스가 함께 온디바이스 AI 기능을 결합한 제품을 개발, 상용화하는 사업을 추진한다. 자금 측면에서는 국민성장펀드를 활용해 팹리스 전용 공공펀드를 만들고, IP 보유 기업과 팹리스 간 전략적 협력에도 투자해 설계 자산 확보를 돕는다.

 

국방 분야에서는 수입 의존도가 99퍼센트에 달하는 국방반도체의 기술 자립이 새 과제로 떠올랐다. 정부는 방위사업청과 산업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관계부처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국방반도체 전주기 기술개발 프로젝트를 출범시키기로 했다. 소재와 설계, 공정, 시스템까지 전 단계에 대한 기술 로드맵을 만들고, 민수용 반도체와의 기술 공유를 통해 양산성까지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이 군수용 반도체 공급망을 전략 자산으로 관리하는 상황에서 한국도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흐름으로 읽힌다.

 

지역 균형 차원에서는 광주와 부산, 구미를 잇는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 구축 계획이 제시됐다. 광주는 글로벌 패키징 선도기업이 이미 자리 잡고 있고, AI 데이터센터 구축으로 신규 패키징 수요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이다. 정부는 이 지역의 앵커 기업과 협력해 소재와 장비, 부품 기업이 참여하는 패키징 허브도시를 조성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부산은 전력반도체 소재와 부품, 장비에 특화된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8인치 탄화규소 실증 팹을 구축하고, 전력반도체지원단 설립을 검토해 기업 지원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긴다는 방침이다. 구미는 반도체 첨단산업 특화단지를 축으로 소재와 부품 기업의 연구개발과 사업화를 집중 지원해 수도권과 다른 차별화된 공급망 거점으로 육성한다.

 

정부는 앞으로 반도체 등 첨단산업 특화단지를 비수도권에 한해 신규 지정할 계획이다. 수도권에서 거리가 멀수록 인프라와 재정에서 우대 지원을 강화해 기업의 지방 이전 또는 신규 투자를 유도하겠다는 구상이다. 지방 반도체 클러스터 내 연구인력에 대해 유연한 노동시간을 허용하는 등 인력 운용 규제도 완화해 실제 근무 환경 경쟁력을 높인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는 첨단 인력이 수도권에만 몰리는 현 구도를 완화하고 지역 대학과의 연계도 강화할 수 있는 장치로 평가된다.

 

소재와 부품, 장비 생태계는 글로벌 넘버원 프로젝트로 묶어 집중 육성한다. 정부는 핵심 첨단 소부장 품목과 성장 잠재력이 높은 기업을 선별해 맞춤형 연구개발과 사업화 지원을 제공한다. 특히 국내 최초로 칩 제조기업과 연계한 소부장 양산 실증 테스트베드인 트리니티팹을 올해 공식 출범시키고 2027년 개소를 목표로 추진한다. 트리니티팹은 설계와 소재, 장비 기업이 실제 제조 환경과 유사한 라인에서 제품을 시험 생산해 양산성을 검증할 수 있는 장으로, 중소 소부장 기업의 글로벌 진입 허들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인력 양성도 중장기 전략에 포함됐다. 정부는 반도체 특성화대학원과 반도체 아카데미를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교육과정을 산업 수요에 맞게 개편할 계획이다. 더 나아가 국내 최초의 반도체 대학원대학 설립도 추진해 석박사급 전문 인력을 대량으로 양성한다. 설계와 공정, 패키징, 장비·소재까지 전 영역을 아우르는 커리큘럼을 통해 특정 기업 중심이 아닌 산업 전반이 필요로 하는 인재 풀을 키운다는 전략이다. 산업계에서는 설계 인력 부족과 공정 엔지니어 수급 불안이 지속돼 온 만큼, 실제 실행 여부에 따라 현장의 인력난 해소에 상당한 영향을 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는 미국과 대만, 유럽, 중국이 각각 대규모 보조금과 인센티브로 자국 반도체 생태계 강화에 나서면서 국가 간 경쟁이 가속화된 상태다. 메모리 중심 강국인 한국은 그동안 시스템반도체와 설계, 장비 분야의 약점이 공급망 리스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아왔다. 이번 전략은 AI 특화 기술과 지역 클러스터, 국방과 소부장, 인력까지 통합한 종합 패키지에 가깝지만, 실제 예산 집행과 민간 투자 연동, 규제 개선이 어느 속도로 진행되느냐에 따라 성과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반도체 주도권 확보가 우리 산업의 명운이 달린 비상한 시기라며, 그동안 실행이 어려웠던 비상한 정책을 추진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강점을 가진 반도체 제조 분야는 전방위 지원으로 세계 1위 초격차를 유지하고, 경쟁력이 부족한 시스템반도체 특히 팹리스 분야는 파운드리와 수요기업 등 온 생태계를 동원해 10배 규모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산업계는 대규모 투자와 제도 정비가 실제 시장 경쟁력으로 이어질지, 그리고 K반도체가 AI 시대에도 세계 투톱 지위를 지킬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문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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