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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고요를 걷는다”…서귀포에서 다시 만나는 제주의 얼굴

정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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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번쩍이는 불빛보다 조용한 바람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여름의 제주가 활기라면, 겨울의 제주는 고요다. 사람들의 발길이 한 걸음 물러난 자리에서 섬의 진짜 얼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화산이 남긴 지형과 겨울의 공기가 만나, 서귀포는 차분한 계절 여행을 부르는 풍경으로 가득 채워진다.  

 

요즘 서귀포를 찾는 이들 사이에선 “겨울이어야 더 잘 보이는 제주가 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간다. 그중에서도 소천지, 백록담, 군산오름, 거문오름은 서로 다른 표정으로 같은 계절을 담아낸다. 사진을 찍어 올리는 대신, 그 자리에서 조용히 머물고만 싶다는 고백이 많아지는 이유다.  

출처=한국관광공사 군산오름
출처=한국관광공사 군산오름

서귀포시 보목동의 소천지는 한라산 백록담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화구호다. 잔잔한 물 위로 산의 윤곽이 어렴풋이 비치고, 주변을 감싼 기암괴석은 겨울 햇살을 받으며 또렷한 선을 드러낸다. 한겨울에도 이곳의 공기는 과하게 차갑지 않고, 적당히 서늘해 사색을 돕는다. 천천히 호숫가를 거닐다 보면, 바다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게 된다. 어느 여행자는 “소천지는 풍경이 크진 않은데, 마음에 오래 남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그 말처럼, 소천지는 거대한 감탄보다는 조용한 여운을 남기는 장소에 가깝다.  

 

한라산 정상부의 백록담은 같은 계절을 전혀 다른 강도로 전한다. 서귀포시 토평동에서 출발해 긴 산행 끝에 마주하는 백록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화구호다. 겨울이면 눈이 산 정상부를 덮고, 분화구 안쪽의 호수는 얼어붙은 채 장면처럼 고요하게 머문다. 등반길은 여유로운 산책과는 거리가 멀고, 제법 숨이 찬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눈 덮인 백록담을 서 있는 눈높이에서 확인하기 위해 겨울 산행을 선택한다. 힘겹게 오르던 사람들이 분화구를 처음 마주하는 순간, 말 대신 길게 숨을 내쉬는 장면이 자주 목격된다. 자연의 크기가 사람의 체감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시간이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계절에 상관없이 한라산을 찾는 이들이 꾸준히 늘고, 특히 겨울 성수기와는 거리가 있는 시기에도 설경을 찾아 일부러 서귀포를 찾는 여행객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현지 관계자들은 느끼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휴양과 레저를 위해 여름 해변을 택했을 여행자들이, 지금은 눈 덮인 분화구와 겨울 숲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셈이다.  

 

서귀포의 군산오름은 조금 더 편안한 방식으로 이 계절을 보여준다. 안덕면 창천리에 자리한 이 오름은 정상 인근까지 차량으로 접근할 수 있어,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나 가벼운 드라이브를 즐기는 이들에게도 부담이 적다. 정상에 서면 서귀포 시내와 산방산, 송악산, 형제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바람이 능선을 스치고 지나가면, 마른 억새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한 배경음처럼 들려온다. 이곳을 찾은 한 여행자는 “겨울 군산오름은 풍경이 화려하진 않은데, 마음이 탁 트인다”고 털어놓았다. 날씨가 허락하는 날엔 해 질 녘 붉게 물드는 바다와 도시의 불빛이 어우러져, 서귀포의 하루가 어떻게 저물어가는지 천천히 보여준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의 거문오름은 또 다른 결의 겨울 풍경을 품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용암 동굴계를 품은 독특한 지형과 생태계로 주목받는다. 울창한 숲은 계절을 조금 늦게 받아들이는 듯, 겨울에도 푸른 기운을 품고 있다. 예약제로 제한된 탐방 인원, 전문 해설사와 함께 걷는 방식 덕분에 숲길에는 과한 소음이 없다. 발자국 소리와 숨소리,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정도의 고요다. 숲 해설사는 “거문오름을 걷는다는 건 단순히 산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섬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몸으로 듣는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겨울 여행의 흐름을 “자기만의 속도로 걷는 휴식”이라 부른다. 빠르게 이동하고, 많이 보고, 가득 채우던 여행에서 이제는 적게 보고, 천천히 느끼고, 비워내는 여행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는 해석이다. 한 관광 심리 연구자는 “사람들이 자연을 찾는 이유가 풍경 감상에서 정서 회복으로 옮겨가고 있다”며 “겨울의 제주처럼 고요한 환경은 마음의 속도를 낮추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겨울 제주 다녀온 뒤로는 성수기엔 잘 안 가게 된다”, “눈 덮인 백록담 한 번 보고 나니 여름 풍경이 다르게 보인다”는 식의 이야기가 여행 커뮤니티에 자주 공유된다. 눈발이 흩날리던 군산오름에서 혼자 서 있던 기억, 물안개가 살짝 오른 소천지의 새벽, 숲 속에서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숨을 고르던 거문오름의 공기가 사람들의 글 속에 오래 남아 있다. 누군가는 “추운 줄도 모르고 서 있던 그 시간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기억난다”고 적었다.  

 

실제로 기자가 겨울 서귀포를 걸어보니, 이곳이 사랑받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특별한 액티비티 없이도 하루가 채워졌다. 백록담을 향한 산행은 몸을 쓰는 여행이었고, 군산오름 정상에서는 바람을 맞으며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을 느꼈다. 소천지의 잔잔한 수면은 마음의 결을 따라 고요하게 흔들렸고, 거문오름 숲길은 말수 적은 친구와 나란히 걷는 시간처럼 편안했다.  

 

겨울의 서귀포는 거창한 이벤트 대신, 잠시 멈춰 서는 연습을 가르쳐 준다. 도심의 속도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자연의 호흡에 맞춰 걷다 보면, 내가 얼마나 바쁘게만 살아왔는지 문득 깨닫게 된다. 거대한 화구호와 작은 소천지, 능선 위 억새와 푸른 숲길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건네지만, 끝내 같은 질문으로 모인다. 지금 나는 어떤 속도로 살고 싶은가.  

 

사소해 보이는 여행지의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겨울의 서귀포를 찾는다는 건 어쩌면 자연을 보러 가는 일이자, 잠시 나를 돌아보러 가는 일일지 모른다. 결국 중요한 건, 어디로 떠나든 그곳에서 내가 어떻게 나답게 숨 쉬고 걸을 것인가일 것이다.

정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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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한라산#군산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