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첨단 노광 더는 남에 못 맡긴다”…미국, 레이저 스타트업 지분 투자로 반도체 자립 가속

이준서 기자
입력

현지시각 기준 1일, 미국(USA) 워싱턴에서 첨단 반도체 공정과 관련한 중대한 투자 결정이 발표됐다. 미국 상무부가 반도체 산업 육성 법안인 칩스법(CHIPS Act)에 따라 레이저 스타트업 엑스라이트에 최대 1억5천만달러, 우리 돈 약 2천200억원을 지분 투자 방식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번 조치는 네덜란드(Netherlands) 기업 ASML에 사실상 전적으로 의존해 온 극자외선 노광(EUV) 기술 분야에서 기술 자립을 시도하려는 전략으로 평가되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논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이날 엑스라이트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 의향서에 서명했다고 발표했다. 지원은 엑스라이트 지분 취득을 수반하는 형태로 이뤄지며, 구체적인 지분율과 기업 가치 등 세부 조건은 공개되지 않았다. 상무부는 이번 투자가 “첨단 반도체 공정의 필수 요소인 레이저 기술 내재화를 뒷받침하는 전략적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반도체 레이저 스타트업 ‘엑스라이트’에 2천200억원 투자…CHIPS법 지분 참여 확대
미국, 반도체 레이저 스타트업 ‘엑스라이트’에 2천200억원 투자…CHIPS법 지분 참여 확대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행정부는 이번 합의를 통해 민간 스타트업과의 직접 파트너십을 강화하며, 국가 차원의 반도체 공급망 강화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첨단 미세공정 생산의 병목으로 지목돼 온 EUV 노광 장비 핵심 부품을 미국 내에서 개발·양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엑스라이트가 개발 중인 레이저는 EUV 노광 장비에 탑재되는 핵심 부품으로, 최첨단 미세공정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고난도 기술로 분류된다. 현재 전 세계 EUV 노광 장비 공급은 네덜란드의 ASML이 사실상 독점하는 구조이며, 이 가운데 레이저 모듈은 제조 난이도가 가장 높은 부품으로 꼽힌다. 이 같은 구조는 ASML과 특정 공급망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이어져 미국의 기술·안보 전략 측면에서 취약 요소로 지적돼 왔다.

 

엑스라이트는 입자가속기에서 파생된 기술을 토대로 기존 반도체용 레이저보다 전력 소모를 크게 줄인 자유전자 레이저(free-electron laser)를 제안하고 있다. 자유전자 레이저는 파장 조절이 유연하고 출력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차세대 EUV 광원 후보 기술로 거론돼 왔다. 로이터는 엑스라이트가 개발 중인 레이저를 ASML의 EUV 노광 장비에 장착 가능한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미국 내 국립 연구소들과 시제품 공동 개발에 나선 상황이라고 전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성명에서 “미국은 너무 오랫동안 첨단 노광 분야를 다른 이들에게 내어줬다”면서 “트럼프 대통령 하에서는 그런 시절은 끝났다”고 강조했다. 러트닉 장관의 발언은 EUV 장비와 핵심 부품에서 대외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 내 기술·생산 역량을 끌어올리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조치는 주변국에도 파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이 공급망 핵심 요소를 자국 내로 묶어두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할 경우, 동맹국과 경쟁국 모두 장기적인 전략 조정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엑스라이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에 본사를 두고 반도체 장비와 레이저 기술을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스타트업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엑스라이트는 올해 3월 인텔의 전 최고경영자 팻 겔싱어를 상임 이사회 의장으로 영입하며 경영 체계를 정비하고 산업 네트워크를 강화했다. 미국 반도체 업계 핵심 인물을 이사회 전면에 내세운 행보는 대형 칩 제조사와의 협력 확대와 추가 투자 유치 포석으로 풀이된다.

 

미국 정부의 이번 투자는 CHIPS법을 활용한 반도체 공급망 강화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미국은 이미 대형 메모리와 파운드리 기업의 공장 증설에 보조금을 제공해 왔지만, 장비와 부품 분야에서 전략적으로 취약한 부분에 대한 직접 지분 투자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엑스라이트 투자는 그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로, EUV 노광 장비 핵심 부품의 기술 내재화와 특정 해외 기업 의존도 축소를 동시에 겨냥한 조치로 받아들여진다.

 

국제사회에서도 미국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유럽연합(EU)과 네덜란드는 이미 미중 기술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ASML 장비의 대중국 수출 규제 문제로 미국과 긴밀히 공조해 왔다. 미국이 이번에 핵심 레이저 기술까지 자국 내에서 육성하려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유럽의 반도체 산업 전략과 ASML의 사업 구조에도 중장기적 조정 압력이 가중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China)은 미국의 CHIPS법이 자국 반도체 산업을 겨냥한 견제 수단이라며 반발해 왔고, 이번 조치 역시 첨단 공정에서 중국의 추격을 제어하려는 시도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주요 외신들은 이번 투자의 의미를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또 다른 전환점으로 평가했다. 로이터는 “미국 정부가 민간 스타트업 지분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레이저와 노광 장비라는 반도체 공정의 가장 복잡한 요소를 전략 자산으로 끌어안으려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블룸버그 통신도 미국이 보조금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기술 주도권 확보를 위한 지분 투자와 파트너십 모델을 강화하는 흐름에 주목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이번 행보가 미중 기술 디커플링과 공급망 블록화 흐름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 국제정치학자는 “EUV 노광 장비와 레이저는 첨단 반도체 생산의 병목이자 지정학적 지렛대”라며 “미국이 해당 영역에서 자립을 추진할수록 중국뿐 아니라 유럽, 한국, 대만 등 주요 반도체 국가의 전략 선택지가 좁아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향후에는 엑스라이트의 기술 상용화 속도와 ASML 등 기존 장비 업체와의 관계 재편 여부가 핵심 변수로 부상할 전망이다. 미국 정부가 추가로 어떤 장비·부품 기업에 지분 투자를 단행할지도 관심이다. 국제사회는 이번 발표가 실제 장비 개발과 생산 능력 확충으로 이어질지, 그리고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구조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준서 기자
share-band
밴드
URL복사
#미국정부#엑스라이트#chips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