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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을 걷는 빛의 물길”…서울빛초롱축제가 바꾼 겨울밤 풍경

오승현 기자
입력

요즘 서울의 겨울밤을 천천히 걷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퇴근 후 곧장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지만, 이제는 청계천과 우이천을 따라 이어지는 빛을 잠시라도 바라보고 싶은 이들의 발길이 앞선다. 사소한 산책이지만, 그 안에는 내 하루를 천천히 되짚어 보는 마음이 담겨 있다.

 

도심 한복판 청계광장에서 삼일교까지, 그리고 도봉구 우이천 우이교에서 수유교까지 이어지는 물길 위로 각기 다른 빛의 장면이 포개지고 있다. 2009년 시작해 어느덧 17회차를 맞은 서울빛초롱축제가 12월 12일부터 다시 서울의 밤을 밝힌다. 한 손에 따뜻한 음료를 쥔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시민들, 삼각대를 세우고 장면을 담는 관광객들, 유모차를 밀며 아이와 함께 멈춰 서는 가족들까지, 축제 구간은 저마다 다른 리듬으로 밤을 보내는 일상의 풍경으로 채워진다.

한지등부터 미디어아트까지…‘서울빛초롱축제’ 서울 도심 밝힌다
한지등부터 미디어아트까지…‘서울빛초롱축제’ 서울 도심 밝힌다

올해 2025 서울빛초롱축제의 주제는 나의 빛, 우리의 꿈, 서울의 마법이다. 개인의 작은 기억과 도시 전체의 꿈을 한 장면 안에 겹쳐 놓겠다는 의도다. 그래서인지 작품 사이를 걷다 보면 누군가는 연인과의 첫 데이트를 떠올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 도시로 처음 올라왔던 날을 떠올린다. 축제 측은 관람객이 각자의 이야기를 빛의 장면 속에 마음대로 덧씌우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청계천 구간은 서울을 상징하는 장면들이 중심을 이룬다. 전통과 현대의 스카이라인이 뒤섞인 도심 풍경을 배경으로, 다리 아래마다 다른 기운의 빛 조형물이 자리 잡는다. 물 위로 번지는 반사광과 주변 건물의 불빛이 겹쳐져, 마치 한겨울 도시에 커다란 야간 갤러리가 열린 듯한 인상을 준다. 한지등으로 표현된 옛 골목과 한옥의 실루엣이 등장하는 지점에서는, 지나가던 이들이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추며 스마트폰을 꺼내는 장면이 반복된다.

 

반면 우이천 구간은 조금 더 느린 호흡의 산책을 돕는 구성이다. 도심 중심부보다 조용한 수변 산책로를 따라 이어지는 작품들은 관람객을 물가 가까이로 부른다. 발밑으로는 잔잔한 물소리가 흐르고, 옆으론 나무의 어두운 윤곽이 드리워진다.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과장되지 않은 빛의 결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사진을 남기기보다, 그저 오래 서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든다. 걷는 행위 자체가 긴 휴식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이번 축제의 중심에는 빛 조형물 전시가 있다.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 것은 한지와 LED를 결합한 작품들이다. 종이의 부드러운 질감과 촘촘히 스며든 빛이 어우러져, 전통 등불의 느낌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다 선명한 색과 형태를 드러낸다. 조선시대 서울의 풍경을 연상케 하는 인물과 건물, 짧은 서사를 담은 장면들이 물길 위에 줄지어 서면,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도시가 한 화면 안에서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에 비해 LED 설치물, 키네틱 아트, 미디어 아트 작품들은 서울의 또 다른 얼굴을 이야기한다. 바람이나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빛의 패턴이 바뀌는 키네틱 작품 앞에서는 아이들이 제일 먼저 몸을 흔들어 본다. 화면과 조명이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미디어 아트 구간에서는, 빛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퍼졌다가 모인다. 어느 지점에 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기 때문에, 몇 걸음 옮기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작품을 만난 듯한 경험이 이어진다.

 

특히 한지등 공간에서 머무르는 관람객들의 표정은 좀 더 차분하다. 얇은 종이 너머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빛의 온도 덕분일까. 누군가는 이 장면을 두고 “어릴 적 골목길에서 보던 연탄불 같다”고 표현하고, 또 다른 이들은 “도심 한복판인데 이상하게 시골집 마당 느낌이 난다”고 말한다. 서울의 과거를 직접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에게도 한지등은 설명하기 어려운 향수를 건넨다. 어쩌면 이것이 전통 소재가 지닌 힘일지도 모른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축제를 주관하는 서울관광재단은 매해 서울빛초롱축제에 수많은 국내외 관람객이 찾고 있다고 설명하며, 올해 역시 가족 단위 관람객, 사진 촬영을 즐기는 젊은 세대,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청계천과 우이천이라는 두 수변 공간을 동시에 활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서울 도심의 야간 동선이 넓어지는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퇴근 후 곧장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빛을 따라 조금 더 멀리 돌아가게 되는 셈이다.

 

관광 측면에서 보면 이 축제는 서울의 밤을 하나의 관광 자원으로 재구성하는 실험에 가깝다. 빛 조형물은 구경거리인 동시에 도심 공공 공간의 쓰임새를 바꾸는 장치가 된다. 낮에는 출퇴근 인파가 지나가는 길목이 밤에는 천천히 걷는 산책 코스로 변하고, 물길 주변 상점과 카페는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힌다. 자연스럽게 지역 상권의 야간 매출이 늘고, 도시의 하루는 조금 더 길어진다.

 

하지만 관람객이 체감하는 변화의 지점은 또 다른 곳에 있다.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물, 서로 다른 색과 재질을 가진 오브제, 끊임없이 점멸하는 빛의 리듬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의식하게 된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도 “이쯤에서 한번 멈춰 볼까”, “생각보다 아무 말도 안 하게 된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또 혼자 걷고 있어도, 도심의 빛을 바라보는 시간만큼은 각자의 내면으로 조용히 침잠해 들어간다.

 

전문가들은 이런 야간 빛 축제를 도시와 인간이 서로를 다시 인식하는 계기로 본다. 화려한 쇼가 아니라, 일상의 공간을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보게 하는 장치에 가깝다는 의미다. 반복되는 출근길 다리, 늘 지나치기만 했던 물가, 무심코 스쳐 가던 골목이 빛을 입는 순간, 사람들은 그곳에 자신만의 기억과 이야기를 덧칠한다. “도시와 관계 맺는 방식이 조금 더 섬세해지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매년 축제를 찾는 이들은 “같은 자리인데도 매번 다른 계절처럼 느껴진다”고 적고,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차분해서 좋았다”고 표현한다. 누구에게는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요한 산책이 올해 겨울을 기억하게 만드는 장면이 된다. 그래서 서울빛초롱축제는 누군가에게 화려한 이벤트라기보다, 한 해를 정리하는 루틴처럼 자리 잡아 가는 중이다.

 

서울빛초롱축제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하나의 공공 미술관으로 바꾸어 보는 실험이자, 야간 문화를 즐기는 방식을 넓히는 긴 프로젝트로 읽힌다. 청계광장에서 삼일교, 우이교에서 수유교까지 이어지는 길 위에서, 국적과 나이,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빛을 바라보며 잠시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맞춘다. 아무 말 없이도 어렴풋한 동질감이 생기는 순간이다.

 

2026년 1월 4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축제는, 서울의 겨울밤을 천천히 거닐고 싶은 이들에게 오래 기억될 한 장면을 남길 예정이다. 도심 하늘 아래에서 빛을 따라 걷는 그 시간은, 분주한 일상 속 어딘가에 고이 숨겨 두었던 작은 소망을 다시 꺼내 보는 조용한 의식처럼 다가온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오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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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빛초롱축제#서울관광재단#청계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