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시험에 스미는 AI 열풍…글로벌 80조 시장 연다
임상시험 전 과정에 인공지능 기술이 스며들면서 제약·바이오 산업의 개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개발 비용과 기간을 극한까지 줄이는 것이 글로벌 제약사의 최우선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임상시험 특화 AI 솔루션 시장이 이미 수조원대로 성장했다. 업계는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며, 임상 설계부터 환자 모집, 데이터 품질 관리까지 AI 활용 범위를 넓히는 추세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발간한 글로벌바이오헬스산업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신약 하나를 시장에 내놓는 데 평균 26억 달러, 한화 약 3조8280억원 이상이 들어가고 개발 기간은 10년에서 15년이 소요된다. 보고서는 AI가 약물 분자와 표적 단백질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분석해 후보물질을 선별하고, 이어지는 임상 단계에서 대상자 모집과 데이터 관리 효율을 끌어올리면서 개발 기간과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시장조사 기관 포춘 비즈니스 인사이트는 글로벌 임상시험 AI 시장 규모가 지난해 27억6000만 달러에서 올해 38억 달러, 약 5조5970억원 수준으로 커질 것으로 추정했다. 2032년에는 548억1000만 달러, 약 80조7187억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임상시험의 복잡성과 비용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효율을 높여줄 도구로 AI 수요가 집중되는 흐름이다.
보고서는 특히 임상시험의 환자 모집 단계가 구조적인 병목으로 지목된다고 설명했다. 전체 임상시험 지연의 약 80퍼센트가 환자 등록 문제에서 발생하며, 적합한 피험자를 찾는 데 드는 시간이 전체 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이때 AI 기반 환자 매칭 엔진은 병원 내 전자건강기록을 분석해 적합한 후보를 자동 선별함으로써 모집 타임라인을 최대 40퍼센트 단축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됐다.
전자건강기록 시스템은 환자의 진료 기록과 검사 결과, 처방 정보 등을 디지털로 저장·관리하는 인프라를 말한다. AI는 이 데이터에서 연령, 질환 유형, 동반 질환, 복용 약물, 검사 수치 같은 임상 변수와 임상시험 프로토콜의 포함·제외 기준을 동시에 비교 분석해, 조건에 맞는 환자군을 빠르게 찾아낸다. 사람 손으로 일일이 차트를 검토할 때보다 시간과 인력 소모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구조다.
실제 활용 사례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4월 미국 AI 기반 정밀의료 기업 템퍼스는 자사 AI 플랫폼을 활용해 암 임상시험 적격 환자 후보를 기존 방식보다 50퍼센트 빠르게 식별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국립보건원도 자국의 임상시험 정보 데이터베이스인 ClinicalTrials.gov에 등록된 수많은 시험과 대상자를 매칭하는 프로세스를 가속화하기 위해 언어 모델 기반 도구인 TrialGPT를 개발했다고 공개했다.
포춘 비즈니스 인사이트는 환자 모집과 유지 관리 분야가 지난해 AI 임상시험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분석했다. 올해에도 이 부문이 전체의 32.7퍼센트에 이르는 점유율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신약 개발 파이프라인이 복잡해질수록 적합한 피험자 발굴과 이탈 관리가 성공률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되면서, 여기에 특화한 AI 솔루션의 상업적 가치가 커지는 양상이다.
시장 구조는 일부 글로벌 플레이어 중심의 반집중 형태로 형성됐다. 보고서는 아이큐비아와 메디데이터가 AI 임상시험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고 짚었다. 이들 기업은 임상시험 설계, 운영, 데이터 수집·분석 기능을 통합한 플랫폼에 기계학습과 자연어처리 기술을 결합해 제약사와 임상시험수탁기관 수요를 흡수하고 있다. 경쟁사들은 특정 질환이나 데이터 품질 관리 등 틈새 영역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차별화를 시도하는 분위기다.
실사용 수준의 도입도 빠르게 확산되는 모습이다. 임상시험 솔루션 기업 메디데이터가 ISR 마켓 리서치와 함께 전 세계 200명 이상 임상 연구 전문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6퍼센트가 속한 조직에서 이미 AI를 도입했다고 답했다. 37퍼센트는 적극적인 활용 가능성을 평가 중이라고 응답해, 단기간 내 도입을 검토하는 조직이 상당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12개월 안에 AI 활용 계획이 전혀 없다고 밝힌 비율은 7퍼센트에 그쳤다.
경험치 기반 평가도 긍정적이다. AI를 사용하는 응답자 가운데 73퍼센트는 도입 효과가 기대에 부합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답했다. 70퍼센트는 데이터 정확도가 개선됐다고 평가했으며, 61퍼센트는 데이터 수집 과정이 간소화됐다고 응답했다. 임상 수행 중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수기 입력 오류나 누락을 줄이고, 실시간 품질 점검이 가능해지면서 통계 분석의 신뢰도가 높아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다만 규제와 윤리 이슈는 여전히 상용화 속도를 제약하는 변수로 남아 있다. 보고서는 데이터 프라이버시와 보안 규정 준수 부담이 AI 임상시험 시장 확대를 제한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전자건강기록과 유전체 정보 같은 민감한 데이터를 대규모로 처리해야 하는 특성상, 각국 개인정보보호 규제와 의료정보 관련 법령을 모두 충족하는 기술·운영 체계가 요구된다. 학습 데이터 편향과 알고리즘 설명 가능성에 대한 논의도 의료 분야에서는 더욱 엄격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개인 맞춤 의학으로의 전환 흐름은 AI 도입을 가속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복수의 전문가들은 정밀의료 확산에 따라 질환별로 세분화된 환자군을 찾아내고, 소규모 맞춤 임상을 설계하는 일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과정에서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AI의 역할이 필수 인프라에 가까운 위상을 얻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산업계는 기술 경쟁과 더불어 규제 정비 속도가 실제 시장 안착을 가를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