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규제 343개 계단식 누적”…대한상의, 기업 규모별 차등규제 전면 재검토 촉구

허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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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업 규모별 차등규제가 주요국 가운데 유일하게 자산·매출·고용 규모에 따라 계단식으로 누적되는 구조를 가진 것으로 분석되며, 성장 정체 국면에서 기업 활동 위축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제력 집중 억제에 초점을 맞췄던 과거 정책 기조가 현재에는 성장 인센티브를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규제 설계 기준을 행위·지위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3일 김영주 부산대 교수 연구팀에 의뢰한 ‘주요국의 기업 규모별 규제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를 공개하고, 미국·영국·독일·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자산이나 매출 규모에 비례해 규제를 단계적으로 강화하는 제도를 두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한국은 상법, 자본시장법, 공정거래법, 외부감사법 등 핵심 경제 법령 전반에서 자산총액·매출액·종업원 수 등의 정량지표에 따라 기업을 구분하고, 규모가 커질수록 새로운 규제 의무가 순차적으로 추가되는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만 기업 규모별 누적규제…12개 법률에 343개 계단식 의무 /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만 기업 규모별 누적규제…12개 법률에 343개 계단식 의무 / 대한상공회의소

김영주 교수 연구팀이 국내 법제를 분석한 결과, 기업 규모에 따라 규제 강도가 단계적으로 증가하는 이른바 계단식 규제가 12개 법률에서 총 343개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정 자산 구간을 넘을 때마다 공시, 지배구조, 내부통제, 집단 지정, 거래 제한 등 다양한 의무가 누적 적용되는 구조로, 성장 단계별로 규제가 층층이 쌓이는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대한상의는 이런 구조가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는 기업에게 구조적 부담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미국의 경우 기업규제를 규모별로 세분화하지 않으며, 법령상 ‘대기업’에 별도의 상시적 추가 규제를 부과하는 명시적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서는 상장회사 여부 등 기업의 법적 지위에 따라 지배구조, 외부감사 등의 의무가 상장 유지 조건으로 작동하고, 독점규제 영역에서도 카르텔, 시장지배력 남용, 기업결합 등 특정 행위를 중심으로 규제 체계를 설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주별 회사법 체계를 운영하고 있지만, 어느 주에서도 자산·매출 기준으로 대기업 범주를 설정해 일괄적인 추가 의무를 상시 부과하는 구조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연구팀은 덧붙였다.

 

영국의 경우 회사법에서 회사를 공개 회사와 폐쇄 회사로 구분해 규제 수준을 달리하지만, 공개 회사를 다시 자산·매출 규모별로 세분해 차등규제를 설계하는 제도는 두지 않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영주 교수는 영미권 규제체계와 관련해 “규제 목적상 기업을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 등으로 세분해 누적 규제를 가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장 여부나 독과점 행위 여부 같은 법적 지위와 시장 행위를 기준으로 규제를 설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의 상법은 자본회사를 소규모·중규모·대규모로 구분하고 있으나, 이 구분은 재무제표 작성, 공시, 감사 등 회계 관련 의무를 정하는 기술적·절차적 용도에 한정돼 있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회계 목적의 규모 구분이 별도의 대기업 규제나 경제력 집중 억제를 위한 상시적 추가 규제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회사법도 자본금 5억엔 이상 또는 부채 200억엔 이상인 회사를 대회사로 정의하지만, 이 범주를 다시 세분해 자산·매출 구간별로 차등규제를 부과하는 체계를 운영하지 않고 있다고 연구팀은 전했다.

 

김영주 교수는 한국 제도의 특성과 관련해 “우리나라는 자산 규모 등을 기준으로 기업집단을 지정하고, 세분화된 자산 구간별로 규제를 누적하는 한편, 상법·공정거래법 등 다양한 법률에서 같은 기준을 중복 적용해 성장 기업에 구조적 부담을 주는 규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상장 여부나 시장 지배력 같은 행위·지위 기준과 별개로, 자산·매출 금액 수준 자체가 규제 진입선으로 작동하는 구조가 성장 유인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한상의는 한국의 기업 규모별 차등제도가 경제 고성장기에 도입돼 경제력 집중 억제와 성장격차 완화를 목표로 일정 역할을 수행해 왔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성장 둔화 국면에서는 역기능이 더 크게 부각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자산이 일정 수준을 넘는 시점마다 규제가 중첩되면, 기업이 투자와 고용을 늘려 규모를 키우는 데 소극적으로 변할 수 있고, 이는 혁신 투자와 생산성 제고에도 부정적인 신호를 줄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종명 대한상공회의소 산업혁신본부장은 “한국 경제의 고성장기에는 기업 규모별 차등 정책이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고 격차를 줄이는 데 나름의 역할과 명분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지금과 같은 성장 둔화기에는 기업이 일정 규모를 넘어설 때마다 규제가 누적되는 구조가 투자와 확장을 위축시킬 수 있는 만큼, 성장을 촉진하고 유인하는 방향으로 차등규제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향후 정부와 국회의 규제 체계 정비 논의 과정에서 자산·매출 기준 계단식 규제를 행위·지위 중심 체계로 전환할지 여부가 기업 투자와 성장 전략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전망이다.

허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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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상공회의소#김영주#기업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