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엔 아직 눈 내릴 자리가 있다”…성북동 겨울 산책이 주는 고요한 위로
요즘 서울에서 일부러 느리게 걷는 사람을 자주 본다. 예전엔 북적이는 번화가가 ‘서울다운 곳’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산자락과 한옥이 있는 동네가 더 큰 위로를 건넨다. 겨울이면 성북구는 그런 이들에게 조용히 문을 연다. 눈 쌓인 기와지붕과 맨발로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도심의 시간은 잠시 옅어진다.
서울 성북구는 북한산의 남쪽 품을 따라 자리 잡은 동네다. 지하철 몇 정거장만 벗어나도 매캐한 매연 대신 흙 냄새와 낙엽 소리가 겨울 공기를 채운다. 골목마다 오래된 담벼락이 이어지고, 언덕 위에선 낮은 한옥 지붕과 고층 아파트가 한 화면에 들어온다. SNS에는 성북동 산책로와 카페, 사찰 풍경을 올린 사진이 겨울마다 꾸준히 올라오고, 댓글에는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히 쉬었다 왔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성북동의 겨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길상사다. 삼각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이 사찰에 들어서면 공기부터 달라진다. 자동차 소리는 서서히 멀어지고, 대신 자갈 밟는 발소리와 소나무에 스며든 바람이 귀를 채운다. 한때 고급요정 ‘대원각’이었던 이곳은 전 재산을 털어 사찰로 시주되면서 1997년 길상사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대웅전과 극락전 사이를 걷다 보면, 화려했던 과거와 담백한 현재가 동시에 겹쳐 보인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부처가 고요히 봉안돼 있다. 겨울 햇살이 법당 문틈으로 스며들면,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부처의 얼굴은 묘하게 따뜻해 보인다. 승려이자 수필작가였던 법정 스님이 회주로 머물렀던 곳이라, 마당의 나무와 돌계단을 바라보는 눈길에도 자연스레 그의 문장이 겹쳐진다. 방문객들은 두 손을 비비며 온기를 나눈 뒤, 경내를 천천히 돌며 저마다의 생각을 정리한다. 번잡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싶을 때 찾게 되는 이유다.
길상사에서 내려오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또 하나의 고즈넉한 공간인 삼청각에 닿는다. 성북동 기슭에 넓게 자리한 이곳은 도심 속 전통 한옥과 숲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 공간이다. 겨울이면 소나무 위로 얇게 눈이 내려앉고, 한옥 지붕 선은 더욱 선명해진다. 잔디마당과 야외 테라스는 푸르름 대신 계절의 색을 그대로 드러내며, 사람들은 두꺼운 코트를 여민 채 잠시 바깥 공기를 들이마신다.
삼청각은 전통 한정식을 중심으로 국내외 손님 접대, 연회, 웨딩, 상견례 같은 중요한 자리가 자주 열리는 곳이다. 상 위에 오른 반가 음식과 궁중 요리는 화려해 보이지만, 한식의 기본을 지키면서도 현대적인 입맛에 맞게 다듬어져 있다. 한옥 별실에 앉아 따뜻한 국물을 한 숟가락 떠 넣는 순간, 창밖 겨울 풍경이 더욱 또렷하게 다가온다. 전문가들은 이런 공간의 인기를 두고 “격식을 갖춘 자리가 필요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호텔 연회장보다 자연과 한국적인 미감을 품은 장소를 선호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경험의 분위기가 음식만큼이나 중요한 시대라는 뜻이다.
성북동의 깊은 결을 만든 또 다른 주인공은 간송미술관이다. 1938년 문을 연 이곳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미술관으로, 간송 전형필 선생이 ‘문화보국’이라는 신념으로 지켜낸 보물들을 품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같은 이름만 들어도 숨이 멎는 국보들이 이곳에서 세월을 견뎌왔다. 지금은 2026년을 목표로 전시 재개를 준비하며 잠시 문을 닫았지만, 성북동 언덕 위에 자리한 미술관의 존재만으로도 이 동네의 공기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
그동안 열렸던 기획 전시는 “한 번 보면 오래 남는 전시”라는 평을 자주 들었다. 유물 하나를 오래 바라보는 관람객의 뒷모습에는, 시험을 위해 배웠던 역사가 아닌 ‘나와 연결된 시간’을 더듬어보는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문화 연구자들은 “간송미술관이 지켜온 수집과 보존의 역사는, 개인이 취향을 위해 예술을 소비하는 지금의 흐름과 이어져 있다”면서 “과거의 미감을 존중하는 태도가 오늘의 라이프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한다. 집 안에 소품 하나를 들일 때도, 스토리와 맥락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그렇다.
성북동 산책의 마지막을 부드럽게 마무리해 주는 곳은 성북동빵공장이다. 언덕 사이 골목에 자리 잡은 이 베이커리는 천연 발효 효모종과 프리미엄 밀가루, 안데스 청정 호수염을 사용해 빵을 굽는다. 문을 여는 순간 퍼지는 빵 냄새와 커피 향은, 차가운 겨울 공기를 단번에 바꾸어 놓는다. 진열대 위에는 담백한 바게트부터 속이 촉촉한 브레드, 한 끼 식사로도 충분한 샌드위치까지 다양한 빵이 줄지어 서 있다.
이곳에서 내리는 커피는 호주산 프리미엄 듁스 원두를 사용한다. 진한 에스프레소 위에 부드러운 우유를 더한 라테 한 잔을 들고 창가 자리에 앉으면, 유리창 너머로 성북동 겨울 풍경이 액자처럼 펼쳐진다. 노트북을 펼쳐 두고 조용히 작업하는 사람, 책을 읽는 손님,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연인들까지, 모두 각자의 속도로 시간을 보낸다. 한 사회심리학자는 이런 풍경을 두고 “카페는 이제 단순한 소비 공간이 아니라, 도시인이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작은 피난처로 기능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주말에 성북동빵공장에서 빵 사서 길상사까지 걸었다”는 산책 후기가 여럿 올라온다. “멀리 떠날 여유는 없어서 선택한 반나절 코스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댓글에도 공감이 이어진다. 바쁘게 일하고, 빠르게 소비하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성북구를 찾는 이유가 여기 있다. 언덕을 오르내리는 짧은 걸음마다, 숨이 조금씩 고르고 생각은 차분해진다.
이런 흐름은 여행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몇 년간 국내 여행 트렌드를 보면, 장거리 이동 대신 가까운 도심 근교에서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는 ‘마이크로 투어리즘’이 꾸준히 언급된다. 유명 관광지보다 동네 산책, 골목 여행, 로컬 카페 탐방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교통과 숙박에 쓸 에너지를 줄이는 대신, 걷고 머무는 시간을 늘리며 삶의 리듬을 다시 맞추고 싶어하는 마음이 반영된 셈이다.
성북구의 길상사, 삼청각, 간송미술관, 성북동빵공장을 잇는 겨울 코스는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종교와 예술, 음식과 자연이 한 동네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그 사이를 걷는 사람들은 조금씩 속도를 늦추게 된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묵직한 역사와 따뜻한 빵 냄새,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느끼다 보면, 스스로에게 조금 더 다정해지고 싶어진다.
겨울의 성북동은 거창한 볼거리를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걷고, 잠시 앉아 생각하고, 따뜻한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시간을 건넨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오늘도 도시 어딘가에서, “멀리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중얼거리며 성북동 언덕을 오르는 발걸음이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