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령 3454개 전수조사"…조원철 법제처장, 숨은 규제 정비 방침
정책 추진 속도전과 법적 안정성 사이 긴장이 커지는 가운데 법제처와 국무총리실이 규제 정비와 입법 지원을 둘러싸고 손발을 맞추겠다고 나섰다. 정부 부처의 법제 수요는 계속 늘어나는 반면 인력과 시스템은 한계에 직면했다는 지적도 동시에 제기됐다.
조원철 법제처장은 12일 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내년 시행령 전수조사 계획을 전면에 내세웠다. 조 처장은 "2026년 법제처는 총 3천454개의 시행령을 전수 조사해 정부 스스로 고칠 수 있는 숨은 규제부터 과감히 고치겠다"고 밝혔다. 날짜와 장소를 특정해 중장기 규제 개혁 로드맵을 공개한 셈이다.

조 처장은 경제, 행정, 사회·문화 등 각 분야별로 순차적으로 시행령을 점검하겠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제, 행정, 사회·문화 등 분야별로 순차 조사를 거쳐 불합리 규정을 일제 정비할 것"이라며 포괄적 조사 방향을 제시했다. 이어 규제 개선을 통해 학교 밖 청소년 지원, 중소기업 부담 완화, 경제형벌 합리화, 청년 경제활동 지원을 핵심 과제로 들었다.
사후 입법 영향 분석 강화 계획도 함께 내놨다. 조 처장은 "사후 입법 영향 분석을 확대해 불합리한 규제가 다시 쌓이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언급했다. 새로운 규제를 만들기보다 기존 규제의 효과와 부작용을 검증해 제도 구조를 손보겠다는 취지다.
국정과제 추진을 위한 입법 지원 강화도 강조됐다. 조 처장은 "긴급입법지원제도를 운영해 부처 이견 등 지원 요인이 발생하면 즉각 조정하거나 대안을 제시해 국정과제 입법의 골든타임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부처 간 이해관계 충돌이나 조정 지연으로 법안 처리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법제처가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는 구상이다.
법령 해석과 관련해서는 정부 유권 해석 절차를 손질하겠다고 밝혔다. 조 처장은 "정부 유권 해석 절차에 즉시 상정 제도를 더해 법 집행의 불확실성을 신속히 해소하겠다"며 "각 부처 주요 정책 추진 과정에서 발생하는 법적 쟁점에 대해 빠르고 정확한 자문을 제공하겠다"고 보고했다. 부처 정책이 현장에서 제때 시행되도록 해석 지연을 줄이겠다는 설명이다.
헌법 가치 확산 계획도 보고에 포함됐다. 조 처장은 헌법교육 확대, 대국민 온라인 강의 제공, 위헌 법령 정비를 통해 공직사회와 미래세대에 헌법 가치를 널리 알리겠다고 강조했다. 헌법 이해를 높여 정책 설계부터 집행 단계까지 헌법 원칙이 반영되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지방자치 강화 방안도 제시됐다. 법제처는 지방정부의 자치권을 보장하기 위해 법제업무 운영규정에 자치입법권 강화 기본원칙을 명문화할 계획이다. 지방정부에서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는 사항은 조례로 정하도록 하는 원칙을 정립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권한 배분을 보다 명확히 하겠다는 구상이다.
법령 정보 인프라 개선도 추진된다. 법제처는 국가법령정보센터에 인공지능 검색 시스템을 도입하고, 세계법제정보센터의 해외 법률정보 제공 범위를 로봇, 방산, 패션 분야로 확대하기로 했다. 첨단 산업과 문화산업 분야 법률 정보를 확충해 관련 정책과 기업 활동을 뒷받침하겠다는 판단이다.
법제처는 지난 6개월간의 성과도 함께 제시했다. 조 처장은 968개 법령에 대한 국정과제 입법계획 수립과 주요 법안 55건의 법제 지원, 노동, 공공의료, 비무장지대 DMZ 평화 이용 등 주요 현안에 대한 법적 자문 제공 등을 주요 성과로 꼽았다. 정부 핵심 과제 추진 과정에서 법제처가 뒷단에서 조정과 지원을 맡아왔다는 설명이다.
이어진 토론에서 국무총리실은 법제처 역할 확대를 주문했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법제처가 정부 부처에 법적 컨설팅을 해야 한다"며 "선제적으로 한 번씩 회의해서 범부처 법적 자문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처별로 흩어져 있는 법적 쟁점을 사전에 조율해 정책 추진 과정의 법적 리스크를 줄이자는 제안이다.
그러나 인력 한계에 대한 문제 제기도 나왔다. 조 처장은 "중앙부처의 법령을 전부 검토해야 하는데 인원이 너무 부족한 한계 상황"이라며 "50명 정도 충원이 되면 조금 여유 있게 자문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규제 전수조사와 긴급입법지원제도, 범부처 자문까지 병행하려면 인력 확충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힌 셈이다.
정부는 법제처 규제 정비 계획을 바탕으로 각 부처와 협의를 이어갈 전망이다. 국회 역시 정부 입법과 연계된 법안 심사 과정에서 규제 개선 방안을 논의할 가능성이 크다. 여야와 정부는 향후 회기에서 국정과제 이행을 위한 입법 수요와 법제처 역량 강화 문제를 두고 보다 구체적인 논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