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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투자 MOU 숙제 끝났다”…정부, 한미 비관세 장벽 협상 준비 착수

윤지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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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거래를 둘러싼 한미 통상 라인이 다시 맞붙었다. 3천500억달러 대미 투자와 연계된 상호관세 조정이 일단락된 가운데, 농산물·디지털 플랫폼·지식재산권을 둘러싼 비관세 장벽 협상이 정국의 새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30일 정부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12월 중 한미 자유무역협정 공동위원회를 열고 미국과 비관세 장벽 관련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관계 부처와 실무 조율에 들어갔다. 통상교섭을 총괄하는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과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각국 대표로 협상 테이블에 앉을 예정이다.

앞서 상호관세 및 대미 투자 협상은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이 주도했다. 양국은 미국이 한국에 부과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인하하는 대신, 한국이 3천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시행하기로 합의하고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한국은 이 가운데 1천500억달러를 조선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나머지 2천억달러는 연간 200억달러 한도 내에서 상업적 합리성을 갖춘 사업에 투입하기로 했다.

 

관세 협상이 마무리된 직후인 17일 여한구 본부장은 기획재정부, 외교부, 농림축산식품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방부 등 관계 부처가 참석한 통상추진위원회를 주재해 향후 비관세 장벽 협상에서 제기될 주요 안건에 대한 한국 측 입장을 정리했다. 이후 세부 협상 의제와 전략을 놓고 부처 간 공조를 이어가고 있다.

 

비관세 협상은 한미 정상 간 합의의 연장선에 있다. 대통령실이 14일 발표한 한미 정상회담 공동 설명자료, 이른바 조인트 팩트시트에 따르면 양국은 상호무역 촉진을 위한 공약과 이행 계획을 추후 논의를 통해 명문화하기로 하고, 비관세 장벽 관련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팩트시트에서 밝힌 대로 USTR과 상호무역 촉진을 위한 추가 논의를 12월 중 한미 자유무역협정 공동위원회를 열어 진행할 예정”이라며 “비관세 장벽 관련 의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구체적인 협상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미 FTA 공동위원회에서는 식품 및 농산물 교역, 온라인 플랫폼 규제, 지식재산권 등 민감한 현안을 둘러싸고 줄다리기가 예상된다. 조인트 팩트시트에는 “한국은 식품 및 농산물 교역에 영향을 미치는 비관세 장벽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과 협력한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이에 통상·농업계 일각에서는 해당 문구가 미국의 시장 개방 압박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정부는 시장 개방과 비관세 장벽 논의는 성격이 다르다며 진화에 나섰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1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검역 절차, 위해성 검사 등 비관세 장벽에 관한 것으로 시장 개방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시장 개방은 관세를 내리거나 쿼터를 조정하는 두 가지 조치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관세 인하나 물량 할당 조정은 이번 협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김 정책실장은 또 “U.S. 데스크를 설치하고 유전자변형작물 검역 절차를 효율화하는 등의 내용은 절차를 개선하는 문제일 뿐”이라며 “비관세 장벽에 대한 표현 때문에 시장이 개방되는 사항은 일절 없다”고 재차 못박았다. 한미 간 협력은 행정 절차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선에서 이뤄진다는 취지다.

 

그러나 조인트 팩트시트에서 한미가 농·생명공학 제품의 규제 승인 절차 효율화, 미국 측 신청 건 지연 해소, 미국산 원예작물 관련 요청을 전담하는 U.S. 데스크 설치, 미국산 육류 및 치즈에 대한 시장 접근 유지 등을 위해 협력하기로 적시한 만큼, 구체 협상 과정에서 수입 확대 논란이 재점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는 쌀·소고기 등 민감 품목은 협의 대상에서 제외됐고, 검역 체계의 기본 틀도 바꾸지 않는 만큼 농산물 추가 개방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농업계에서는 협력 강화를 계기로 사실상 중단 상태였던 미국산 농산물 검역 절차가 빨라질 경우, 사과·배·복숭아 등 미국산 과채류의 수입 일정이 앞당겨져 실질적인 추가 수입 확대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를 내놓고 있다.

 

디지털 통상 분야도 핵심 쟁점이다. 한미는 팩트시트에서 망 사용료, 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서 미국 기업이 차별을 받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하기로 합의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 등 다양한 데이터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구글의 고정밀 지도 반출 문제는 이러한 협의의 상징적 시험대가 되고 있다. 구글은 2007년과 2016년에 이어 올해 2월에도 1대 5천 축적의 고정밀 지도 국외 반출을 신청했으나, 조인트 팩트시트 발표 직전인 11일 국토교통부로부터 다시 보류 통보를 받았다. 구글은 연이은 보류 결정에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다만 구글이 국내 안보시설 가림 처리, 좌표 노출 금지 등 정부가 요구하는 안전조치를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힌 만큼, 관련 내용을 반영한 보완 신청서를 제출할 경우 국토교통부가 지도 반출 여부를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 그러나 구글이 국내 데이터 센터 설치에는 사실상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 데이터 주권과 안보를 둘러싼 논쟁은 비관세 협상에서 또 다른 쟁점으로 부각될 전망이다.

 

지식재산권, 노동, 환경 규제, 수산 보조금, 공급망 공조 강화 등도 협상 테이블에 오른다. 한미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기후 규범 강화, 디지털 전환 등 신통상 이슈가 맞물린 상황에서, 규범과 기준을 조율하기 위한 실무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다. 관련 협상은 각 분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

 

통상 당국 관계자는 “조인트 팩트시트에서 발표한 범위 내에서만 현안을 놓고 협상이 이뤄질 예정이어서 큰 돌출 변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며 “최대한 국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미측과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관계 부처와 전략을 가다듬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12월 한미 FTA 공동위원회에서 비관세 장벽 협상의 방향성을 윤곽 짓고, 후속 회의를 통해 세부 이행 방안을 조율해 나갈 방침이다. 정국이 통상 현안을 둘러싼 새로운 마찰 요인을 안게 된 만큼, 국회는 관련 보고와 점검을 이어가며 다음 회기에서 통상 정책 전반에 대한 본격 논의에 나설 계획이다.

윤지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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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구#제이미슨그리어#대미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