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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밥이 되고 카페가 쉼이 된다”…전남 곡성에서 찾은 가을 하루의 여유

김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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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거창한 볼거리보다 조용히 머물 수 있는 숲, 마음을 덜어내는 한 끼가 더 중요해졌다. 그렇게 자연과 미식이 함께하는 하루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휴식의 형태가 됐다.

 

전남 곡성은 이런 변화를 고요하게 품은 곳이다. 섬진강을 따라 흐르는 물길과 겹겹이 쌓인 산세가 어우러져, 차를 타고 조금만 달려도 풍경이 부드럽게 바뀐다. SNS에는 붐비는 관광지 대신 한적한 산사와 숲속 카페, 수제 돈가스를 곁들인 식사 사진이 곡성 해시태그와 함께 올라온다. 잠깐 다녀왔다는 짧은 후기 속에도 “한 번 더 가고 싶다”는 여운이 남는다.

도림사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도림사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곡성읍 월봉리 동악산 성출봉 중턱에 자리한 도림사는 가을 곡성 여행의 시작점으로 어울린다. 신라 무열왕 7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오래된 사찰이지만, 첫인상은 의외로 담백하다. 사찰 입구에 걸린 허백련 화백의 ‘도림사’ 현판이 공간의 분위기를 단정하게 정리해 준다. 보광전, 약사전, 응진당, 명부전이 차분하게 배치돼 있어 빠르게 둘러보기보다 천천히 걷게 만든다.

 

도림사를 더 특별하게 만드는 건 곁을 흐르는 도림계곡이다. 동악산 남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사계절 내내 계곡을 채우고, 노송과 암반, 작은 폭포가 이어지며 자연스러운 풍경을 만든다. 가을이면 계곡 주변 나무들이 색을 입어 물과 나뭇잎이 함께 반짝인다. 사찰 마당을 걸어 내려가 계곡 물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발걸음도, 생각도 느려진다. 방문객들은 “딱히 할 건 없는데 오래 머물게 된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조용한 산중의 시간이 마음속 빈칸을 채워 준다.

 

이런 변화는 숫자 대신, 여행자의 동선으로 확인된다. 유명 관광지를 빠르게 찍고 넘어가기보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코스를 직접 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쉼’에 집중한 카페와 식당들이 관심을 받는다. 곡성의 숲과 미식이 어우러진 공간들도 그런 흐름 속에서 눈에 들어온다.

 

도림사에서 차로 이동하면 오곡면 미산리의 카페 공림에 닿는다. 인가에서 떨어진 숲속에 자리 잡은 이곳은 도착 순간부터 공기가 달라진다. 주변에 높은 건물 대신 나무들이 빽빽하게 둘러서 있어, 카페 문을 열기 전부터 이미 숲속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깔끔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숲의 분위기와 과하게 경쟁하지 않고, 큰 창 너머로 계절이 고스란히 들어온다.

 

공림의 메뉴판에서 눈에 띄는 건 직접 재배한 재료로 만든 음료들이다. 대추, 산머루, 사과를 착즙한 시그니처 음료는 설탕보다 자연의 단맛이 앞선다. 진하게 고소한 흑임자 크림 라떼는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담백한 향이 퍼지면서 디저트가 따로 필요 없을 만큼 여운이 길다. 가을바람이 창을 스쳐 지나가는 오후면, 손에 잡히는 건 컵 하나뿐인데 머리는 아무 생각 없이 텅 비워지는 느낌을 준다. 한 방문객은 “음료를 마신다기보다, 숲을 마시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숲속 카페에서 충분히 머물렀다면, 슬슬 배를 채우고 싶어진다. 죽곡면 용정리에 자리한 식당 지리산가는길은 그런 흐름을 알고 기다리던 곳처럼 느껴진다. 이름처럼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한 이곳은 신선한 냉장 재료로 만든 수제 돈가스로 입소문을 탔다. 메뉴는 익숙하지만, 공간이 주는 인상은 조금 다르다.

 

통 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숲이 오늘의 식탁 배경이 된다. 가을이면 단풍이 물든 나무들이 프레임처럼 창을 둘러싸고, 접시 위 따뜻한 돈가스와 숲의 색감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두툼한 고기를 바삭하게 튀겨낸 수제 돈가스는 재료 본연의 맛에 방점을 찍는다. 자극적인 소스 맛보다 고기 자체의 풍미가 먼저 느껴져, 천천히 씹어 먹게 된다. 여행객들은 “드라이브하다가 우연히 들렀다가 단골이 됐다”고 고백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여행 방식을 ‘리셋을 위한 미니멀 여행’이라고 부른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기보다, 적은 동선 속에서 숲을 보고, 사찰을 걷고, 차를 마시고, 한 끼 식사에 집중하는 흐름이다. 익숙한 프랜차이즈 대신 그 지역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연과 공간, 음식이 함께 만들어내는 감정을 여행의 기준으로 삼는 셈이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곡성 관련 게시글에는 “서울에서 당일치기로도 충분하다”, “부모님 모시고 가기 좋은 코스”, “혼자 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반응이 함께 달린다. 누군가는 도림사에서 부모님과 나눈 짧은 대화를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공림 창가 자리에 앉아 책 한 권을 다 읽었다고 적는다. 여행의 목적이 ‘남에게 보여줄 사진’에서 ‘나에게 남는 시간’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곰곰이 들여다보면, 곡성에서의 하루 코스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오전에는 동악산 자락 도림사와 도림계곡을 따라 천천히 걷고, 점심에는 숲 전망을 배경으로 수제 돈가스를 맛보며 몸을 채운다. 오후에는 숲속 카페 공림에서 직접 재배한 과일로 만든 음료를 마시며 마음을 식힌다. 눈에 띄게 화려한 일정은 아니지만, 도심의 피로가 옅어지는 감각은 분명하다.

 

여행이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어도 좋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조용한 사찰의 마당, 창밖으로 넘어오는 숲의 그림자, 정성 들여 만든 한 끼가 하루를 충분히 채워 준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곡성에서 보내는 가을날의 여정은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김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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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도림사#공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