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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뺑뺑이 해소” 의협·소방청, 면책 논의…디지털 이송 개편 촉발

박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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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환자가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제때 진료를 받지 못하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문제가 필수의료 인력 이탈과 응급 의료체계 붕괴로 번지고 있다. 디지털 기반 이송 플랫폼과 응급실 실시간 병상관리 시스템 도입 논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현장의 의사와 구급대원이 과도한 형사 책임에 노출돼 있다는 지적도 거세다. 업계에서는 응급의료 종사자에 대한 법적 안전망이 마련돼야 AI 기반 트리아지, 스마트 119 이송 시스템 등 디지털 헬스 인프라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한의사협회는 1일 세종시 소방청사에서 소방청과 간담회를 갖고 응급의료와 이송체계 전반의 구조적 개선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고 2일 밝혔다. 최근 응급실 수용불가가 일상화되며 환자·보호자 불만이 폭증하는 상황에서, 응급의료 현장의 근본 원인을 짚고 제도·기술·이송체계를 연계하는 협력 모델을 모색한 것이다.

의협은 응급의료 붕괴의 핵심 원인으로 살인적 수준의 사법 리스크에 따른 필수의료 기피, 배후 진료 인프라 부족, 컨트롤타워 부재를 꼽았다. 특히 생사가 갈리는 응급상황 특성상 최선의 조치를 했더라도 결과가 나쁘면 의료진이 중한 형사 책임을 지는 구조가 반복되면서,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비롯한 필수의료 인력이 이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적정 인력이 유지되지 못하면 병상·장비·IT시스템을 늘려도 수용능력이 회복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문제는 최근 각 지방자치단체와 병원이 도입 중인 스마트 응급의료체계와도 맞물린다. 구급차에서 실시간으로 영상·바이탈 데이터를 전송해 병원에서 선제 대응하는 시스템이나, AI가 중증도를 분류해 이송 병원을 추천하는 디지털 플랫폼이 확대되고 있지만, 의료진이 사후 책임을 우려해 중증 환자 수용에 소극적으로 변하면 기술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의협과 소방청이 응급의료 종사자에 대한 면책특례를 핵심 의제로 올린 배경이다.

 

소방청도 응급의료 인력 보호 필요성에 공감하며, 법적 안전망 구축이 시급하다고 의견을 같이했다. 현재 119 구급대원과 응급실 의료진은 동일한 현장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거나, 병원 간 실시간 가용자원 데이터가 연동되지 않아 다수의 병원에 전화를 돌리는 전통적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사후 분쟁 우려 탓에 과잉 진료나 불필요한 상급병원 이송이 선택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 현장 반응이다.

 

양측은 이번 간담회를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기 위해 응급의학 학회, 지역 의사회, 보건복지부 등 관계 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다자간 협력 거버넌스를 만들기로 했다. 여기에는 단순 제도 개선뿐 아니라, 국가 단위 응급의료 데이터 플랫폼 고도화, 구급 이송 의사결정 지원 시스템, 병원 간 연계 전자의무기록 인프라 등 디지털 헬스 기반 확충 논의도 포함될 수 있다. 의협과 소방청은 향후 법률 개정안 대응과 주요 응급의료 현안에 대해 공동으로 목소리를 내겠다는 방침이다.

 

현장의 병목 중 하나인 경증 환자 처리 방식도 손질 대상에 올랐다. 코피, 단순 열상처럼 비교적 간단한 처치로 해결 가능한 경증 환자가 대형병원 응급실을 점유하면서, 중증 환자가 대기 끝에 치료 기회를 놓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의협과 소방청은 지역 의사회와 시·도 소방본부가 협력해 119 구급대가 경증 환자를 지역 내 의원급 의료기관으로 직접 이송하는 시범사업을 긍정 검토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모바일 기반 병원 검색, 실시간 진료 가능 여부 조회 등 디지털 도구 활용이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AI 기반 응급 트리아지, 스마트 구급차, 클라우드 기반 응급의료 정보망 구축 경쟁이 본격화된 상황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응급실 과밀화를 줄이기 위해 원격의료, 가상 응급실, 모바일 앱 기반 사전 문진 서비스를 접목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이런 기술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응급의료 종사자의 임상 판단을 보호하는 법적 장치와 책임 범위가 명확해야 한다는 논의가 병행된다.

 

국내에서도 응급의료체계 디지털 전환을 위한 법·제도 정비가 과제로 떠올랐다. 응급의료에 투입되는 데이터 플랫폼은 환자 상태, 이송 기록, 처치 내용, 결과를 연속적으로 축적해 알고리즘 고도화와 정책 설계에 활용할 수 있다. 동시에 개인정보 보호와 의료데이터 활용 규제를 조정해야 하며, 응급 상황에서의 신속한 의사결정을 뒷받침하는 별도 가이드라인 마련 필요성도 제기된다.

 

간담회에서 김승룡 소방청장 직무대행은 응급환자 앞에서 소방과 의료기관이 하나의 팀이 돼야 한다며 권역 및 지역응급의료센터의 중증 응급환자 수용 협력을 요청했다. 박명하 대한의사협회 상근부회장은 응급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현재 이송 시스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의협과 소방청이 적극 협력하자고 제안했다.

 

이날 회의에는 의협에서 박명하 상근부회장, 서신초 총무이사, 김성근 공보이사 겸 홍보이사, 김충기 정책이사가, 소방청에서 김승룡 청장직무대행, 박근오 119대응국장, 백승두 대변인, 유병욱 119구급과장, 박용주 구급의료팀장이 참석했다. 산업계와 의료계에서는 이번 논의를 계기로 응급의료 현장의 사법 리스크와 디지털 인프라 확충 논의가 맞물려, 응급실 뺑뺑이 해소를 향한 제도·기술 개편이 속도를 낼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박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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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사협회#소방청#응급실뺑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