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아시아로 빅파마 추격하자…K제약 R&D 격차 경고
제약바이오 산업의 성장 축이 비만 치료제에서 항노화와 뇌신경계 질환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 규모가 글로벌 빅파마와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미국 투자기업 플래그쉽 파이오니어링의 이병건 한국 고문은 글로벌 제약사 일라이릴리의 단일 기업 연구개발비가 한국 제약바이오 전체 R&D 투자와 정부 정책자금을 합친 수준을 크게 상회한다며, 현 구조로는 정부가 내세운 글로벌 바이오 5대 강국 목표 달성이 쉽지 않아 보인다고 진단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발언을 한국 바이오 산업이 단순 기술 수출과 개별 기업 경쟁력을 넘어, 아시아 통합 및 규제·투자 생태계 재편을 서둘러야 한다는 경고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병건 고문은 2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25 제약바이오투자대전에서 한국과 글로벌 빅파마 간 R&D 격차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했다. 그는 한국의 전통 제약회사 약 500곳과 수백 개의 바이오벤처를 모두 합쳐 연간 연구개발에 약 5조원을 쓰고 있는 반면, 미국 일라이릴리는 단일 기업이 연간 약 17조원을 투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가총액 기준으로도 일라이릴리가 약 1506조원에 달하는 반면,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 전체의 몸값과 연구비 규모는 여전히 제한적이라는 평가다. 여기에 정부의 정책금융자금 5조원이 더해지지만, 절대 규모와 투자 속도에서 구조적인 격차가 존재한다고 봤다.

그는 이러한 한계를 보완할 전략으로 인구 43억명에 달하는 아시아 시장의 통합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바이오 US, 바이오 유럽에 대응하는 블록 개념의 바이오 아시아 플랫폼을 구축해 임상, 허가, 시장 진입을 묶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의약품규제조화위원회 ICH에 대응하는 아시아 차원의 규제 가이드라인 ACH 제정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를 비롯한 각국 규제기관이 공조해 임상시험 설계, 데이터 제출 기준, 안전성 평가를 조화시키면, 신약 개발 비용과 시간을 줄이면서도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향후에는 중동까지 포함하는 확장 전략을 통해 아시아·중동 메가마켓을 구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글로벌 치료 트렌드 변화에 대한 분석도 제시됐다. 최근 몇 년간 면역항암제가 신약 시장을 주도했다면, 현재는 비만 치료제가 차세대 성장 엔진으로 부상한 상황이다. 이병건 고문은 앞으로는 항노화 치료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상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비만 치료제 이후의 미래 신성장 산업으로 뇌신경계 질환과 항노화 치료를 꼽으며, 파킨슨병, 치매 등 다양한 중추신경계 질환으로 적응증을 확장할 수 있는 플랫폼 기술과 치료제 개발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했다. 특히 항노화 치료 기술을 기반으로 의료관광 산업을 결합하면, 치료제 수출을 넘어 서비스 산업까지 확장하는 복합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는 시각을 제시했다.
한국이 선택해야 할 전략 분야와 차별화 포인트도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이병건 고문은 한국이 우수한 의사와 연구자 등 인력, 상급종합병원 중심의 최고 수준 의료시설, 줄기세포 치료제 판매 경험 등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기반을 활용해 단순히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항노화 의료서비스, 장기 체류형 검진·치료 프로그램, 재생의료 센터 등을 결합한 의료관광 허브를 지향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동아시아 고령 인구 증가와 건강 수명 연장 수요를 감안할 때, 항노화와 뇌신경계 질환 분야는 아시아 중심의 수요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영역으로 꼽힌다.
그는 신성장산업 육성 전략을 두 개의 트랙으로 나눠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트랙은 기존의 기술 수출 모델을 유지하되, 모든 권리를 일괄 이전하는 계약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유한양행의 폐암 표적치료제 렉라자 사례처럼 한국과 아시아 지역의 판권을 확보하는 구조로 기술 이전을 설계하면, 글로벌 파트너의 개발 역량을 활용하면서도 자국 및 지역 시장에서의 수익성은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 같은 구조는 아시아 통합 전략과도 맞물려, 다국적 제약사와의 협력 구도에서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방식으로 해석된다.
두 번째 트랙으로는 항노화 치료제와 같은 차별화 영역에 자원을 집중하고, 이를 의료관광 산업과 연계하는 전략을 제안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항체약물접합체 ADC 신약 기술 경쟁이 치열하지만, 막대한 투자와 전문 인프라를 요구하는 만큼 한국 기업이 단기간에 선도권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대신 유전자 교정, 재생의료, AI 기반 디지털헬스, 오가노이드, 엑소좀과 같이 성장 초기 단계이면서도 기존 강점과 결합 가능한 미래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 분야는 개인 맞춤형 치료, 질환 조기 진단, 약물 반응 예측 등과 연결돼 정밀의료 수요 확대에 직결되는 영역이다.
규제 혁신과 데이터 인프라 구축도 핵심 과제로 제시됐다. 이병건 고문은 리얼월드 데이터, 즉 실제 진료 현장에서 축적되는 임상정보와 처방 데이터의 활용 폭을 과감히 넓혀야 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임상 설계의 효율을 높이고, 허가 후 실사용 데이터 기반의 적응증 확대와 안전성 검증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리얼월드 데이터의 활용 확대는 개인정보 보호, 데이터 표준화, 책임 소재에 대한 논의가 병행돼야 해 규제기관과 산업계, 의료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과제가 따른다.
투자 환경과 인력 측면에서는 글로벌 자본과 경험을 끌어들이는 구조 개편이 요구된다고 짚었다. 그는 K바이오의 기회 요인으로 기업가치 저평가, 비용 대비 경쟁력이 있는 임상시험 환경, 아시아 시장 허브로서의 지리적 이점을 꼽았다. 이러한 요소를 앞세워 글로벌 바이오펀드와 전략적 투자자를 유치하면, 단순 자금 조달을 넘어 개발 파이프라인 공동 설계, 글로벌 임상 분담, 판매 채널 공유 등 실질적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동시에 경험 많은 최고경영자와 최고과학책임자 등 C레벨 인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빅파마와의 네트워크를 확장해 연구성과를 수주 계약과 라이선스 딜로 전환하는 실행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이 구조적인 R&D 투자 격차를 안고 있는 만큼, 개별 기업의 기술력만으로 글로벌 빅파마를 추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진단했다. 대신 아시아 통합, 규제 조화, 미래 기술 선택과 집중, 의료관광 결합 모델 등 거시적인 전략을 통해 산업 생태계 전체의 체급을 키워야 한다는 주문이다. 산업계는 제시된 청사진이 실제 제도 개선과 투자 확대, 구체적 사업 모델로 이어질지, 그리고 한국이 바이오 아시아 구상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