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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세포만 골라 없애는 TPD…K바이오, 플랫폼 승부 건다

신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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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세포 내 단백질을 선택적으로 분해해 질병의 뿌리를 제거하는 표적단백질분해 TPD 기술이 차세대 항암 모달리티로 급부상하고 있다. 기존 표적항암제가 단백질 활성을 ‘잠시 묶어두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TPD는 세포 고유의 분해 시스템을 활용해 문제 단백질 자체를 제거하는 접근법이다. 복잡한 암 신호전달망과 내성 문제를 우회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글로벌 제약사와 투자업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으며, 국내 기업들도 독자 플랫폼과 임상 진입, 해외 기술이전 성과를 바탕으로 존재감을 키우는 흐름이다. 업계는 TPD가 실제 상업화 단계에 도달하는 시점을 항암제 패러다임 전환의 분수령으로 바라보는 분위기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TPD 기반 신약 개발 기업 유빅스테라퓨틱스는 이달 초 코스닥 상장을 위한 예비심사신청서를 제출했다. 유빅스테라퓨틱스는 자체 개발한 TPD 치료제 발굴 플랫폼 Degraducer를 보유하고 있으며, 혈액암과 고형암을 동시에 겨냥한 파이프라인을 구축했다. 현재 B세포 림프종을 적응증으로 하는 UBX-303-1은 미국, 한국, 폴란드에서 임상 1상이 진행 중이다. 고형암을 겨냥한 UBX-106은 비임상 단계에서 독성, 유효성 데이터를 축적하는 단계다. 플랫폼 기업으로서 다수 파이프라인을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하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TPD 기반 신약 개발에 나선 핀테라퓨틱스도 기업공개 추진에 속도를 내고 있다. 회사는 내년 하반기 상장예비심사 청구를 목표로 기술특례상장 평가 준비에 돌입했다. 핀테라퓨틱스는 CK1α 선택적 분해제 PIN-5018의 임상 1상에서 첫 환자 투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PIN-5018은 CK1α를 선택적으로 분해하는 MGD 계열 물질로, CK1α 단백질을 직접 제거하는 기전을 가진다. CK1α는 특정 악성 종양에서 세포 생존과 증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백질로 알려져 있으며, 분해 기전 약물은 단순 억제제보다 내성 회피 잠재력이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  

 

TPD 기술이 주목받는 배경에는 기존 표적치료제의 구조적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약물은 표적단백질의 활성 부위에 결합해 기능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이러한 기전은 결합 부위 변이로 인한 내성, 특정 구조를 가진 단백질만 타깃으로 할 수 있다는 한계, 장기 투여 시 누적 독성 문제가 반복 제기돼 왔다. 특히 암세포가 대체 신호전달 경로를 활성화하거나 결합 부위를 변경하는 식으로 약을 회피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TPD는 세포가 원래 가지고 있는 단백질 분해 시스템, 대표적으로 유비퀴틴 프로테아좀 경로에 질병 관련 단백질을 선택적으로 끌어당겨 분해를 유도하는 원리를 사용한다. 활성 부위에만 결합할 필요가 없어 단백질 표면의 어느 부위든 안정적으로 붙을 수 있는 결합점만 찾으면 되며, 약물 분자가 촉매처럼 여러 차례 반복 사용될 수 있어 투여량을 줄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결과적으로 암 관련 단백질을 세포 내에서 완전히 제거해 내성 발생 여지를 줄이고, 기존에 ‘약물이 잘 듣지 않던’ 난공략 타깃까지 포섭할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 있다.  

 

시장 조사에 따르면 TPD는 아직 상용화된 승인 약물이 없는 초기 기술이지만 성장 속도는 가파를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신약개발사업단의 신약 모달리티 개발동향 분석 자료는 글로벌 TPD 시장이 2023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27퍼센트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2030년 시장 규모는 33억 달러에 도달할 것으로 봤다. 아직 허가 약이 없어 실제 시장성을 가늠하기는 이르지만, 초기 임상에서 기전 검증에 성공하는 물질이 나올 경우 성장 궤적이 크게 가팔라질 가능성도 있다.  

 

국내에서는 오름테라퓨틱이 독자 기술 플랫폼과 대형 기술이전 계약으로 TPD 영역에서 눈도장을 찍었다. 오름테라퓨틱은 차세대 표적 단백질 분해 치료제 개발을 위한 TPD2라는 자체 기술을 확보하고 있으며, 지난해 버텍스 파마슈티컬과 최대 1조3000억 원 규모의 글로벌 다중 타깃 라이선스 및 옵션 계약을 체결했다. 기술 플랫폼 자체 가치를 글로벌 빅파마가 인정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오름테라퓨틱은 내달 미국혈액학회 연례학술대회에서 신규 후보물질 ORM-1153의 전임상 데이터를 발표할 계획이다. ORM-1153은 TPD2 GSPT1 기술로부터 도출된 후보로, 급성골수성백혈병 등 혈액암을 타깃으로 개발 중이다. 회사 설명에 따르면 전임상 연구에서 ORM-1153은 AML 모델에서 뚜렷한 항종양 효과를 보였고, TP53 변이를 포함한 CD123 양성 혈액암에서도 잠재적 치료 가능성을 보여줬다. 난치성, 재발성 혈액암 영역에서 새로운 옵션이 될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업테라는 세포 분열 조절 핵심 인자인 PLK1을 직접 분해하는 TPD 기반 후보물질 UP1002로 글로벌 임상에 들어섰다. PLK1은 세포주기 조절에 필수적인 키나아제로, 암세포처럼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에서 과발현되는 대표 타깃이다. 기존에는 PLK1 활성을 막는 억제제들이 개발됐지만, 독성과 내성 문제로 임상 개발에 난항을 겪어 왔다. 업테라는 PLK1 단백질 자체를 제거하는 TPD 전략으로 접근해 이 한계를 넘겠다는 구상이다.  

 

지난달 업테라는 미국 식품의약국으로부터 소세포폐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UP1002 임상 1·2a상 시험계획 승인을 받았다. 회사 측은 PLK1을 타깃으로 하는 TPD 계열 신약이 글로벌 임상에 진입한 첫 사례라고 설명한다. 초기 용량 증량과 안전성 검증, 약동학 평가 결과에 따라 향후 적응증 확장과 병용 요법 개발도 검토될 전망이다. 소세포폐암처럼 예후가 나쁘고 선택지가 적은 암에서 의미 있는 반응이 관찰될 경우 기술 가치가 크게 재평가될 수 있다.  

 

글로벌 제약 시장에서는 이미 여러 TPD 플랫폼 기업과 빅파마 간 제휴가 활발하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형 제약사가 초기 단계부터 TPD 스타트업에 지분 투자와 다중 타깃 공동 연구를 병행하며 포트폴리오를 넓히는 중이다. 한국 기업들은 아직 승인 약물은 없지만, 플랫폼 기술 수출과 해외 임상 진입에서 속도를 내며 글로벌 경쟁 구도에 합류하는 상황이다. 특히 오름테라퓨틱과 같이 조 단위 라이선스 계약을 확보한 사례는 국내 TPD 생태계 전반의 기술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효과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TPD는 작용 기전이 복잡한 만큼 규제와 개발 리스크도 적지 않다. 세포 내 단백질 분해 시스템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특성상 오프타깃 단백질까지 함께 분해되는지, 장기 투여 시 예기치 못한 독성이 나타나지 않는지에 대한 검증이 중요하다. 아직 식품의약국이나 유럽 규제기관이 TPD 전용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단계는 아니지만, 임상 개발 과정에서 작용 기전 입증과 바이오마커 설정을 엄격하게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에서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혁신 항암제 심사 인프라를 보강하는 가운데, 구조가 복잡한 새로운 모달리티에 대한 심사 기준을 어떻게 마련할지가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TPD가 궁극적으로 표적항암의 지형을 바꿀 잠재력을 지녔다고 보면서도, 특정 타깃에서 임상적 유효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입증한 1호 약물이 나오는 시점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플랫폼 경쟁과 상장, 대형 기술이전이 이어지고 있지만, 실제로 환자 생존 기간을 개선하는 결과를 도출한 약이 등장하는지가 시장 판도를 가를 핵심 변수라는 분석이다. 산업계는 한국 기업들이 앞선 플랫폼과 글로벌 임상 경험을 무기로 TPD 상용화 경쟁에서 어느 정도 지분을 확보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신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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