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리튬·희토류는 우리 땅에서 가공”…라틴아메리카, 미 공급망 재편 속 자원 전략 전환 주목

최하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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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기준 2일, 영국 런던에서 진행된 미주개발은행(IDB) 일랑 고우드파잉 총재의 인터뷰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리튬과 희토류, 구리 등 핵심 광물의 역내 공급망을 구축하며 미국(USA)의 새로운 자원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미·중 갈등 속에서 미국의 공급선 다변화 전략과 중·남미의 부가가치 확대 구상이 맞물리며 국제 광물 시장의 지형 변화가 가속하는 양상이다.  

 

고우드파잉 총재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중요 광물의 역내 공급 체계를 구축하는 조치를 서두르고 있다”고 밝혔다. FT 보도에 따르면 라틴 아메리카를 포함한 중·남미 지역은 전 세계에서 확인된 리튬 매장량의 약 60%를 보유하고 있으며, 글로벌 구리 생산량의 46%를 차지한다. 브라질은 희토류 매장량 기준으로 중국에 이어 세계 2위로 평가된다.  

중·남미, 리튬·희토류·구리 앞세워 미 공급망 대안 부상…IDB 자금 집행 300억달러
중·남미, 리튬·희토류·구리 앞세워 미 공급망 대안 부상…IDB 자금 집행 300억달러

그는 이 같은 자원 강국들이 기존의 ‘원광 수출’ 모델에서 벗어나 제련·가공 단계까지 자국 내에서 수행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리튬과 구리 등은 대부분 원자재 형태로 아시아, 특히 중국으로 수출됐지만, 최근 각국 정부가 제련·가공 시설을 유치해 산업 전후방에서 더 큰 부가가치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고우드파잉 총재는 이러한 움직임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행정부의 전략 기조와도 궤를 같이한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과의 무역·기술 분쟁 과정에서 희토류 등 핵심 자원이 전략적 도구로 활용된 경험을 토대로, 본국 인근 지역에서 광물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정책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좌우 이념과 관계없이 여러 라틴 아메리카 정부가 자국 내에서 자원의 부가가치를 높이려 하고 있으며, 미국도 이 지역에 안정적인 공급 체계가 자리 잡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는 이러한 구조 변화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됐다. 고우드파잉 총재는 “아르헨티나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리튬의 70%를 제련 이전 상태로 중국에 수출하고 있고, 중국에서 제련을 거친 뒤에는 리튬 가격이 8~9배로 뛴다”고 지적했다. 그는 큰 가격 차이 때문에 중·남미 국가들이 리튬을 비롯한 주요 광물의 제련·가공 능력을 자국에 구축하려는 경제적 유인이 매우 강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광물 산업 구조 전환의 핵심 요인으로 ‘장기 공급 계약’을 꼽았다. 장기 구매 계약이 체결돼야 관련 인프라 조성에 필요한 민간·공공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사례로 칠레가 독일과 체결한 20년에 걸친 친환경 ‘그린 수소’ 장기 공급 계약이 언급됐다. 칠레 정부는 이 계약을 기반으로 아직 초기 단계에 있는 현지 수소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IDB 자금을 도입했고, 이를 통해 수소 관련 인프라 투자가 본격화되고 있다고 고우드파잉 총재는 전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광물 프로젝트에 대한 직접 투자도 확대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북서부 살타주에서 이차전지 소재 등급의 리튬을 채굴·제련하는 ‘리오 틴토’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며, 총 규모는 25억달러에 달한다. IDB는 이 가운데 1억달러를 대출 형태로 지원해 프로젝트를 뒷받침했다.  

 

이 같은 광물·에너지 관련 투자 확대에 힘입어 IDB의 올해 자금 집행 규모는 300억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년 230억달러 대비 30.4% 늘어난 수치로, 역내 인프라와 자원 산업에 대한 국제 금융의 관심이 크게 높아진 흐름을 보여준다.  

 

미국의 대외 전략 재편도 중·남미 광물 인프라 투자에 추가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이 미·중 무역 갈등 과정에서 희토류를 압박 카드로 활용하자, 7월부터 11월 사이 미국 희토류 기업 MP머티리얼스를 포함한 광물 기업에 잇따라 투자하며 대중 의존도 축소에 나섰다. 고우드파잉 총재는 이러한 기조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가 라틴 아메리카 내 광물 인프라 개발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미국과 브라질(Brazil), 멕시코(Mexico), 콜롬비아(Colombia) 등 라틴 아메리카 주요국 정부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다르지만, 자원 공급망 확충이 역내 경제 발전을 견인해 미국으로 향하는 불법 이민을 줄이는 효과에도 주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자원 협력을 통해 경제·안보·이민 현안을 동시에 관리하려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다.  

 

국제 경제·안보 전문가들은 라틴 아메리카가 보유한 리튬과 희토류, 구리가 전기차와 배터리, 재생에너지 전환에 필수적인 만큼, 역내 제련·가공 능력 확충은 글로벌 공급망의 다극화를 촉진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미국이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근거리 아웃소싱’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IDB의 금융 지원이 뒷받침되면서, 중·남미가 핵심 광물 시장에서 전략적 위상을 강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남미 국가들의 광물 부가가치 전략, 미국의 공급망 재편, IDB의 대규모 금융 지원이 맞물리며 향후 라틴 아메리카가 글로벌 희토류·리튬·구리 시장에서 어떤 존재감으로 자리매김할지 주목되고 있다.

최하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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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랑고우드파잉#미주개발은행idb#트럼프행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