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떠내려온 평화의 소”…애기봉 안치로 분단 상징 다시 소환
분단의 상처와 평화 염원을 상징해 온 평화의 소가 다시 정치적 상징 공간인 애기봉으로 옮겨지며, 남북 관계의 굴곡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구조돼 화해의 상징으로 불렸던 이 소의 유해가 북녘을 바라보는 자리에 안치되면서, 남북 교류가 끊긴 현 국면에서 상징 정치의 무게가 한층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기도 김포문화재단은 11월 29일 평화의 소 유골함을 김포시 통진두레문화센터에서 애기봉평화생태공원 전시실로 이전하고 전시장을 열었다고 3일 밝혔다. 애기봉은 김포시 하성면에 위치한 대표적인 접경 지역 상징 공간으로, 남북 관계의 온도를 가늠하는 장소로도 활용돼 왔다.

전시실 창밖으로는 평화의 소가 처음 발견된 김포 무인도 유도와 함께, 애기봉에서 약 1.4㎞ 떨어진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과 북이 불과 수 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접경의 현실이 유골함이 놓인 자리와 겹치며, 안보와 평화 메시지가 동시에 부각되는 구조다.
유골 이전에 앞서 경기도 무형문화재 통진두레놀이보존회는 11월 27일 애기봉 인근에서 노제를 지냈다. 통진두레놀이보존회는 제를 통해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고, 북녘에서 떠내려와 남쪽에서 생을 마감한 소의 넋을 기리는 의식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김포시장을 지낸 강경구 통진두레놀이보존회장은 “평화의 소가 고향 땅을 볼 수 있도록 유골함을 애기봉으로 이전하는 사업을 오래전부터 추진했는데 마침 공간이 생겨 안치 장소를 옮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접경 지역 정치·행정 경험과 지역 문화 활동을 함께 해온 인물로, 평화 상징 자산을 접경 지역에 재배치하는 작업을 주도해 왔다.
평화의 소는 1996년 7월 대홍수 당시 북측에서 떠내려와 김포 무인도 유도에서 발견됐다. 유도 일대는 남북 중립지역으로 분류돼 군사적 긴장이 상존하는 구역이어서, 발견 직후 바로 구조 작업을 진행하지 못했다. 소의 안전과 군사적 규정을 둘러싼 난제가 맞물리면서 구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이후 국방부와 유엔군사령부 정전위원회가 구조를 허가하면서 1997년 1월 해병대 청룡부대가 작전명 부엉이를 수행해 소를 육지로 옮겼다. 군 당국이 정전 체제 규정을 준수하는 범위 안에서 인도적 구조 작전을 벌인 사례로, 당시에도 이례적인 남북 접경 인도주의 사건으로 주목을 받았다.
구조 당시 소는 지뢰를 밟는 사고로 왼쪽 발목이 부러진 상태였다. 치료를 받은 뒤 건강을 회복했고, 이듬해인 1998년에는 제주도 암소와 결연해 혼례를 치렀다. 북에서 떠내려온 유도 황소는 평화의 소라는 이름을 얻었고, 제주 암소는 통일염원의 소로 불렸다. 접경 지역에서 치러진 두 소의 혼례는 분단 현실 속에서 상징적 통합을 연출한 사건으로 지역 사회와 정치권의 관심을 동시에 모은 바 있다.
평화의 소는 아내 소와 함께 7마리의 새끼를 낳으며 남한에서 새로운 혈통을 이어갔다. 이후 2006년 16살의 나이로 자연사했지만, 후손은 인천과 제주 등지의 농가에서 8대에 걸쳐 사육돼 온 것으로 전해졌다. 남북 정치 상황과 무관하게 농가 현장에서 혈통이 이어진 점은, 평화·화해 메시지가 생활 영역에서 지속돼 왔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한다.
통진두레놀이보존회는 농경 전통문화를 보전하기 위한 활동의 하나로, 올해 4월 평화의 소 후손인 1년생 암송아지 1마리를 인수해 김포시 하성면 농가에 사육을 의뢰했다. 접경 지역에서 농경 문화와 평화 상징을 접목하는 일종의 ‘문화 안보’ 실험으로, 향후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의 평화 관련 정책과 연계될 여지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강경구 통진두레놀이보존회장은 “분단의 아픔과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진 평화의 소가 비록 통일을 맞이하진 못했지만 애기봉 하늘 위에 지지 않는 큰 별이 돼 못다 한 평화의 전도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애기봉에서 북녘을 바라보는 유골함의 위치가 접경 지역 주민에게는 안보 현실을, 동시에 평화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장치가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애기봉은 냉전기부터 종교계와 보수·진보 진영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남북 관계 담론을 펼쳐 온 상징적 공간이다. 이제 이곳에 평화의 소 유골함까지 더해지면서, 접경 지역을 둘러싼 정치적·문화적 상징의 층위가 한층 복합해졌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향후 중앙정부와 김포시 등 지자체가 애기봉과 평화의 소를 활용한 평화·안보 교육, 남북 교류 준비 사업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접경 지역 정책의 방향이 보다 구체화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