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원박사 시대”…임문영, 소버린AI로 AI패권 승부수
인공지능이 지식을 폭발적으로 증식시키는 지식 인플레이션 시대가 열리면서 국가 경쟁력의 기준이 정치적 리더십에서 지식 리더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거대언어모델과 생성형 AI의 대중화로 누구나 소액의 비용만 지불하면 박사급 수준의 지식을 상시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지식을 선점하고 활용하는 소수 인재와 그렇지 못한 다수 사이의 격차가 국가와 산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한국의 소버린 AI, 즉 자국 주권형 AI 전략 수립과 AI 3강 구도 진입 여부를 가르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임문영 국가AI전략위원회 부위원장은 9일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가 주최한 디지털인사이트 포럼 기조강연에서 AI가 촉발한 지식 구조 변화와 국가 전략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현재를 “3만원만 내면 박사급 답변을 무제한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라고 규정하며, AI가 지식을 축적하는 속도와 규모를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사회 시스템과 규칙 자체를 바꾸는 자기 변형 단계에 진입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정치적 권위와 진리에 대한 규정 권위가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술 관점에서 임 부위원장이 지적한 변화의 핵심은 대규모 언어모델과 생성형 AI가 기존의 선형적 지식 생산 방식을 비선형적 지식 증폭 구조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논문, 특허, 교과서 등 구조화된 지식만이 학습과 정책 결정의 토대가 됐다면, 이제는 인터넷상의 비정형 데이터까지 통째로 학습한 모델이 인간 수준, 혹은 특정 영역에서 인간을 초과하는 응답을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사용자가 던지는 질문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모델이 축적된 전체 지식 공간을 탐색해 답을 구성하기 때문에, 개별 전문가의 경험치에 의존하던 기존 의사결정 방식과 질적으로 다른 환경이 조성됐다는 설명이다.
임 부위원장은 이러한 지식 환경 변화가 글로벌 기업의 인재 전략과 산업 재편으로 직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구글 순다르 피차이 최고경영자가 “AI 인재 확보를 위해 전체 인력 감축이 불가피하다”고 언급한 사례를 들며, 소수의 초고급 AI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다수 인력을 과감하게 조정하는 흐름이 공공연해졌다고 소개했다. 메타가 특정 인재에게 연봉 800억원 수준을 제시하고, 스케일AI 창업자 알렉산더 왕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얀 르쿤과 같은 세계적 석학조차 19세 창업자 출신에게 보고해야 하는 구조가 형성된 사례는, 연공서열과 직급 위계가 아닌 지식과 성과 중심으로 권력 구조가 재편되는 상징적 장면으로 제시됐다.
AI 기술 경쟁 구도에서도 조직과 전략의 재편이 목격되고 있다. 임 부위원장은 오픈AI 등 신생 기업이 주도권을 잡자 구글이 세르게이 브린을 전면에 복귀시키고 딥마인드와 구글 브레인을 강제 통합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같은 통합 투자와 3년에 걸친 집중 개발의 결과물이 제미나이 3.0이라고 평가하며, 이를 통해 구글이 다시 패권 경쟁의 최상단으로 복귀했다고 진단했다. 반대로 애플은 이 경쟁 흐름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면서 AI 전환 국면에서 상대적으로 고전하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이는 빅테크조차 AI 전략과 조직 개편 속도에 따라 시장 내 위상이 빠르게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AI는 IT·소프트웨어 영역을 넘어 기초 과학의 난제 해결로도 확장되고 있다. 임 부위원장은 데미스 허사비스가 단백질 구조 예측 AI인 알파폴드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 이어, 핵융합 분야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을 언급했다. 그는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상용화 이전 단계인 핵융합 전력을 선구매하는 ‘선수요 확보’ 전략으로 미래 에너지 패권을 선점하려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행보는 AI 기반 시뮬레이션과 제어 기술이 핵융합의 플라즈마 안정화, 최적 운전 조건 탐색 등 기존에 난제로 여겨졌던 영역에서 실질적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기대를 반영한 것으로 분석된다.
기술 패권은 곧 국가 안보 전략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임 부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추진 중인 제네시스 미션을 과거 핵무기 개발 맨해튼 프로젝트, 달 탐사 문샷 프로젝트에 이은 미국의 3대 국가 프로젝트로 평가했다. 그는 미국이 현재 상황을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닌 전쟁 상태로 인식하며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여기에는 AI, 에너지, 우주, 양자 등 전략 기술 전반을 국가 안보와 직결된 요소로 바라보는 시각이 깔려 있고, 연방정부와 민간 빅테크의 긴밀한 공조 구조가 강화되는 추세로 해석된다.
군사 영역에서 AI의 파괴력은 이미 현실에서 검증되고 있다. 임 부위원장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관측된 저가 드론의 활용을 예로 들며, 값싼 지능형 드론이 고가 무기체계를 무력화하는 장면은 기존 군사 균형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AI 기반 자율비행, 표적 인식, 군집 제어 기술을 탑재한 드론이 재래식 지상·공중 전력을 압도하는 국면에서, 미국이 ‘국제 경찰’로서 유지해온 영향력도 흔들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일본이 중국을 자극하며 헌법 개정을 통해 전쟁 가능한 나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동아시아 전체가 새로운 군사적 긴장과 분쟁 가능성에 노출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인류 차원의 실존적 위험에 대한 경고도 뒤따랐다. 임 부위원장은 AI 연구의 선구자로 꼽히는 제프리 힌튼 교수의 발언을 인용해 “우리는 우리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와 함께 살아본 경험이 없다”고 강조했다. 지구 역사에서 더 높은 지능을 가진 존재가 낮은 존재를 지배해온 패턴을 감안하면, 인류보다 뛰어난 지능체와 공존하면서도 지배를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 필연적으로 제기된다는 설명이다. 초거대 모델이 자율적인 목표 설정과 전략 수립 능력을 갖추는 수준에 도달한다면, 인간이 의사결정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법과 윤리, 기술 안전장치를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시급해지는 맥락이다.
이러한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임 부위원장은 한국의 생존 전략으로 소버린 AI와 지식 리더십을 제시했다. 소버린 AI는 자국이 주권을 갖고 개발·운영·통제하는 거대언어모델과 AI 인프라를 의미한다. 그는 한국이 자체 거대언어모델을 보유한 국가라는 점을 언급하며, AI G3 구도에서 3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위와 동급의 기술·서비스 수준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산 플랫폼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언어·문화·정책 측면에서 종속 위험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데이터 주권과 알고리즘 주권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국가 전략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리더십 측면에서는 정치가 아닌 지식 주도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임 부위원장은 미국 사례를 들며 “미국은 기업가, 혁신가들이 공개적으로 나와 자신들이 할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우리나라는 정치인이 주로 떠들고 기업이나 지식인은 목소리를 낮춘다”고 지적했다. AI, 에너지, 바이오, 반도체 등 고난도 기술이 국가 방향을 사실상 결정하는 시대에는,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물이 정책과 전략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취지다.
그는 고대 전차 경주에서 세 마리 말 중 가장 오른쪽에 배치되는 멍에 없는 말 파레오로스를 비유로 들었다. 파레오로스는 전차를 직접 끌지는 않지만, 코너링과 가속 구간에서 방향과 균형을 잡는 결정적 축 역할을 맡는다. 임 부위원장은 “지금의 지식인이 바로 이 파레오로스가 돼야 한다”고 말하며, 지식이 역사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는 시대에 전문가 집단이 국가 전략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기 정치 일정이 아닌 장기 기술 패권 구조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한국이 소버린 AI를 통해 언어와 데이터 측면의 주권을 유지하면서도, 글로벌 AI 생태계와의 연계를 통해 기술·인재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을지에 주목하고 있다. AI 인프라 투자, 반도체와 클라우드 자원 확보, 인재 유치와 교육 체계 개편, 규제와 윤리 프레임 정립이 종합적으로 맞물려야 실질적인 AI G3 진입이 가능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기술과 지식 리더십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한국이 어떤 속도와 방향으로 전략을 조정할지에 산업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