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지도 해외이전 줄다리기”…애플, 국내서버 검토에 속도
정밀 지도 데이터의 국외 반출을 둘러싼 논쟁이 애플까지 확전되고 있다. 구글에 이어 애플의 국내 정밀 지도 해외 이전 심사도 내년으로 넘어가며, 한국 정부와 글로벌 빅테크 간 데이터 거버넌스 줄다리기가 길어지는 양상이다. 특히 한국 영토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축척 1대 5000급 정밀 지도는 자율주행, 국방, 스마트시티 등 미래 산업 인프라의 핵심 자산이어서, 산업 경쟁력과 국가안보, 통상 규범이 복합적으로 얽힌 ‘디지털 통상 분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업계에서는 애플이 국내 데이터센터 설치와 보안 처리 방안을 어디까지 수용하느냐에 따라 글로벌 지도 플랫폼 생태계와 국내 위치 정보 산업 지형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은 5일 애플이 정밀 지도 국외 반출 신청서 보완을 위한 기간 연장을 요청함에 따라, 심사 처리 기한을 내년으로 미루겠다고 밝혔다. 애플은 지난 6월 16일 축척 1대 5000 디지털 지도의 해외 반출을 신청했으나, 정부는 9월 4일 국가안보와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결정을 12월 8일까지 유보한 상태였다. 애플이 보완 신청을 예고하면서 협의체 심의와 최종 결정 시점도 함께 뒤로 밀렸다.

정부가 애플에 요구하는 핵심 보완 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는 군사·보안 시설 등 민감 정보에 대한 영상 보안처리, 둘째는 좌표의 정밀도와 표시 범위를 제한하는 기술적 조치, 셋째는 한국 내 서버 또는 데이터센터 설치를 포함한 사후관리 체계다. 구글 심사 과정에서 제기된 쟁점과 동일한 구조가 애플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특히 국내 서버 설치 여부는 물리적 데이터 저장 위치뿐 아니라 관할권, 세제, 규제 준수 범위와 직결돼 글로벌 빅테크가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조건으로 꼽힌다.
애플이 6월 국토지리정보원에 제출한 기존 신청서에는 “반출된 한국 지도 정보 저장 장소를 한국, 미국, 싱가포르로 한정해 보안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원론적 문구만 들어갔다. 국내 안보 우려에 대해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겠다는 입장도 함께 명시됐지만, 영상 비식별 처리 방식이나 좌표 정밀도 제한, 국내 데이터센터 구축 계획 등 구체 조치는 담기지 않았다. 실제 소유·운영 중인 데이터센터 위치도 미국과 싱가포르로만 적시해, 한국 내 인프라 설치 의사에 대해서는 여지를 남겨둔 상태였다.
이후 당국과의 비공개 협의 과정에서 애플은 영상 보안처리와 좌표 표시 제한 조건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내 데이터센터 설치에 대해서는 “열린 입장”을 표하면서도, 기술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단서를 붙였다. 한국에 데이터센터를 설치할 경우 국제 조세 규범상 고정사업장으로 간주돼 법인세 납부와 각종 국내 규제 준수 의무가 발생할 수 있어, 애플을 포함한 다국적 IT 기업들은 국내 데이터센터 직접 설립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해 왔다.
구글 역시 비슷한 궤적을 밟고 있다. 구글은 정밀 지도 반출 심의 과정에서 대외적으로는 영상 보안처리와 좌표 제한을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 신청서에는 해당 내용을 명시하지 않았다. 정부는 지난달 11일 구글에 대해 “대외적 의사 표명과 신청 서류 간 불일치로 정확한 심의가 어렵다”며 기술적 세부사항 보완을 요구했고, 서류 보완을 위한 60일을 추가로 부여했다. 업계에서는 애플도 사실상 같은 수준의 명문화 요구를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정밀 지도 기술은 단순 내비게이션을 넘어, 3차원 공간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자율주행차량 경로 계획, 드론 비행 관리, 도시 인프라 모니터링, 디지털 트윈 구축 등 다양한 고부가가치 서비스에 활용된다. 축척 1대 5000 수준이면 건물, 도로, 교량 등 주요 시설의 위치와 형상이 상당히 정밀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모사 공격이나 테러 위협에 악용될 소지도 함께 존재한다. 정부가 영상 비식별화와 좌표 정밀도 제한을 조건으로 내건 배경도 여기에 있다.
특히 이번 사안은 글로벌 지도 플랫폼 경쟁과 직결돼 있는 만큼, 국내 산업에도 파장이 크다. 구글맵과 애플 지도는 전 세계 스마트폰 생태계에서 사실상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어, 한국 정밀 지도가 두 플랫폼에 모두 반출될 경우 국내 위치 정보·내비게이션 서비스의 경쟁 압력이 커질 수 있다. 반대로 반출이 계속 지연되면 글로벌 앱과 서비스에서 한국만 지도 기능이 제약되는 상황이 유지돼, 관광·물류·스타트업 서비스 확장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글로벌 비교로 보면, 주요 국가들은 안보 민감도가 높은 지도 데이터에 대해 각기 다른 규제 모델을 적용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민간 위성 영상과 상업 지도 서비스에 비교적 개방적인 편이지만, 군사 기지나 핵심 기반시설에 대해선 일정 수준의 비식별 처리를 요구한다. 중국은 국가안보법과 측량법을 근거로 고정밀 지도 제작과 배포를 강하게 통제하고 있으며, 외국 기업이 자국 내 고정밀 지도 서비스를 제공할 때 현지 합작과 데이터 로컬라이제이션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관리한다. 한국의 정밀 지도 반출 심사 역시 이들 모델 사이에서 ‘부분 개방, 조건부 허용’에 가까운 형태로 자리 잡아 가는 분위기다.
향후 결정 과정에서 통상 변수도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달 한미정상회담 공동 팩트시트에는 “망 사용료, 온라인 플랫폼 규제 등 디지털 서비스에 관한 법과 정책에서 미국 기업이 차별받지 않고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한다”는 문구와 함께, 위치 정보와 개인 데이터 등 데이터의 국경 간 전송을 촉진하기 위한 협력 의지가 담겼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무역장벽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정밀 지도 국외 반출 심사를 ‘디지털 장벽’으로 지목해 왔고, 미국 컴퓨터통신산업협회를 포함한 IT 업계 단체들도 한국 정부에 지도 반출 허용을 공식 요구하고 있다.
이달 중 예정된 한미 간 비관세 장벽 협상도 지도 반출 결정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양국은 연말까지 비관세 장벽 해소와 상호 무역 증진을 위한 공약과 이행 계획을 문서화해, 한미 자유무역협정 공동위원회에서 채택하기로 합의했다. 한국 산업통상자원부와 미국 상무부가 담당하는 이 논의 테이블에서 정밀 지도 규제가 의제로 오를 경우, 정부가 안보와 디지털 통상 원칙 사이에서 어느 수준의 절충안을 제시할지가 관건이다.
업계에서는 지도 반출 문제를 통상 현안과 완전히 분리해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미국 측 요구 강도가 높아질수록 국내에서는 데이터 주권과 국가안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IT 업계 관계자는 “비관세 협상 결과에 따라 정부가 국내외 기업에 제시하는 조건 범위가 조정될 여지가 있다”며 “국내 데이터센터 설치와 보안 처리 의무를 어느 수준까지 명문화하느냐가 빅테크의 사업 전략과 국내 위치정보 산업 모두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밀 지도 해외 이전을 둘러싼 논쟁이 단기적으로는 플랫폼 간 서비스 편의성 문제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 데이터 전략과 디지털 통상 규범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안보와 산업 경쟁력, 통상 압박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어떤 조건과 절차를 통해 지도 반출을 허용하거나 제한할지에 따라, 향후 데이터 인프라 관련 정책의 기준선이 정해질 수 있어서다. 산업계는 이번 심사와 협상이 정밀 지도뿐 아니라 다른 전략 데이터 영역에도 선례가 될 수 있는 만큼, 기술적 안전장치와 제도적 신뢰를 어떻게 동시에 구축하느냐를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