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독립운동가 후손 돕는 것은 당연한 도리"…의병장 후손 병원장, 수술비 전액 지원

조보라 기자
입력

역사 앞에서 소외된 독립운동가 후손과 그를 돕겠다는 또 다른 독립운동가 후손이 맞붙었다. 독립유공자의 딸이 척추 수술비 부담으로 수술을 망설이던 상황에서, 구한말 의병장의 후손인 병원장이 의료비 전액 지원을 결정하면서 국가의 역할과 민간 연대의 과제가 다시 떠올랐다.

 

국립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21일 배국희 전 미주 광복회 회장이 지난 12일 서울 새길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라고 전했다. 배국희 전 회장은 독립유공자 배경진 지사의 딸로,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배국희 전 회장의 부친인 배경진 지사는 일제강점기 신의주 위화청년단을 결성해 독립군을 지원했고, 이어 광복군에 입대해 국내 파견 공작대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무장투쟁 지원과 공작 활동에 나서며 항일운동에 전념한 인물로 평가된다.

 

배국희 전 회장 역시 부친의 뜻을 이어 미주 광복회와 대한인국민회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유공자 선양에 앞장섰다. 동시에 생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을 돌보는 데 힘을 쏟았고, 한인 사회에서 독립운동 계승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는 2019년 공로를 인정받아 KBS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100년상을 수상했다. 당시 받은 부상금 3천만원 전액을 장학금으로 기부해 후배 세대 지원에 나섰다. 당시에도 배 전 회장은 상금 사용을 개인보다 공동체를 위한 선택으로 돌려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배 전 회장은 지난해부터 척추협착증으로 통증이 악화했음에도 미국 현지에서 적절한 수술 병원을 찾지 못했다. 결국 국내 의료기관을 찾게 됐지만,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재외동포 신분 특성상 부담해야 할 예상 치료비는 2천만원 수준으로 책정됐다.

 

이에 따라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의 이윤옥 박사가 나섰다. 국내에 마땅한 연고가 없는 배 전 회장을 위해 임시 보호자를 자처하며 지원 창구를 물색했고, 개인 모금 활동도 병행했으나 여의치 않은 상황이 이어졌다.

 

여러 방안을 모색하던 이윤옥 박사는 끝내 병원 측에 사연을 직접 알리기로 했다. 그는 배국희 전 회장의 독립운동가 후손 이력과 지금까지의 공로, 그리고 경제적 형편을 상세히 적은 편지를 새길병원 측에 전달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새길병원에서 예상 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병원을 운영하는 이대영 원장이 배 전 회장의 사정을 듣고 의료비 전액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이 원장은 독립유공자의 직계 후손이었다.

 

병원 관계자는 "이대영 원장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만도 선생의 후손"이라며 "독립운동가 후손을 외면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도의적인 차원에서 의료비를 지원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병원 차원의 전액 면제 결정이었다.

 

이만도 선생은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인재이자 한말 의병장으로 기록돼 있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그는 국치에 항거해 같은 해 9월 17일부터 단식에 들어갔고, 24일째 되던 10월 10일 순국했다. 일제 강점기 초반 국권 회복 의지를 온몸으로 드러낸 상징적 인물이다.

 

이윤옥 박사는 "조금이나마 도움을 청하기 위해 편지를 쓴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져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배 전 회장은 수술 후 경과가 안정돼 22일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독립운동사연구소 안팎에서는 이번 사례를 계기로 재외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에 대한 의료·복지 제도 보완 필요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각종 법과 제도가 있지만, 해외 거주 후손과 고령자 의료 사각지대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문제 제기다.

 

정치권에서도 유사 사례가 알려질 경우 국가 책임 강화를 요구하는 논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여야는 그간 독립유공자 처우 개선 법안과 예산을 두고 협의를 이어왔고, 국회 보훈 관련 상임위에서도 재외 독립운동가 후손 지원 확대 논의가 반복돼 왔다.

 

국회는 향후 정기 국회와 예산 심의 과정에서 재외 독립유공자 후손 의료 지원 확대와 제도 정비 여부를 놓고 논의를 이어갈 전망이다. 정치권은 독립운동가 공훈을 둘러싼 예우와 현실 지원 수위를 두고 다시 한 번 공방과 협의를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조보라 기자
share-band
밴드
URL복사
#이대영#배국희#이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