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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산사를 감싸 안았다”…가을 속리산에서 찾은 조용한 쉼표

문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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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을만 기다렸다가 충북 보은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그저 ‘단풍 명소’로 불렸지만, 지금은 산과 계곡, 산사가 함께 있는 조용한 쉼터의 일상이 됐다. 사소한 여행이지만 그 안에서 숨 고르듯 삶의 리듬을 다시 맞추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충북 보은군은 소백산맥 줄기가 유려하게 뻗어 내려와 겹겹이 산을 이루는 고장이다. 그 사이사이로 깊은 계곡이 파고들고, 오랜 세월을 견딘 문화유산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을이면 이 산봉우리들이 붉고 노란 빛으로 물들어,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도 그 자체로 한 편의 풍경화가 된다. 그래서 SNS에는 “올해 첫 단풍은 속리산에서 시작했다”는 인증 사진이 이어진다.

법주사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법주사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이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해마다 가을이면 속리산국립공원을 찾는 탐방객 수가 크게 늘고, 그중 상당수가 당일치기나 1박 2일 일정으로 보은 일대를 함께 둘러보는 여행을 택한다. 장거리 해외여행 대신 주말마다 가까운 산과 계곡을 찾는 흐름과 맞물리면서, 속리산은 ‘가을이 시작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속리산은 높이 1천58m, 아홉 개의 봉우리가 어깨를 맞댄 산이다. 예로부터 구봉산이라 불리며 명산 대접을 받아왔고, 화강암 봉우리와 울창한 숲이 만들어내는 대비가 특히 가을에 빛난다. 천왕봉, 문장대, 비로봉을 잇는 능선을 따라 서서히 고도를 높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뭇잎이 발치에서 머리 위까지 색을 바꾸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문장대에 올라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 위로 단풍 물결이 출렁이는 듯 펼쳐져, 무심코 숨을 고르게 된다.

 

숲길을 걷다 보면 기암괴석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은폭동계곡, 용유동계곡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물소리와 낙엽 밟는 소리가 겹쳐져 도시의 소음을 밀어내고, 나무 그늘 아래 잠시 앉아 눈을 감으면 “여기서는 시간도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인지 등산 대신 가벼운 숲 산책만 즐기고 내려오는 이들도 많다.

 

속리산 자락에는 천년 고찰 법주사가 자리 잡고 있다. 신라 진흥왕 시기 의신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 산사는, 이름 그대로 ‘부처님의 법이 머무는 절’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산책로를 따라 경내에 들어서면 먼저 공기가 달라진다. 말소리가 자연스럽게 낮아지고, 오래된 나무와 기와지붕이 만들어내는 그늘이 마음까지 차분하게 깔아앉힌다.

 

법주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중 한 곳이다. 팔상전, 쌍사자석등, 석련지 등 국보급 문화재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시간의 층위를 밟는 기분이 든다. 특히 팔상전 앞에 서면 목조 건축이 가진 단정한 비율과, 그 앞마당을 물들이는 단풍의 대비가 인상 깊다. 한 방문객은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었다가, 그냥 한참을 바라만 보게 됐다”고 표현했다.

 

경내 한가운데 우뚝 선 33m 높이의 청동미륵불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붙잡는 상징 같은 존재다. 가을 햇살이 미륵불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면, 그 빛이 다시 단풍잎에 반사돼 사찰 전체가 은은하게 물드는 듯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래서 “법주사는 가을에 완성된다”는 말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산사 여행 열풍을 ‘느린 호흡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바라본다. 심리 상담 분야에서는 자연 속 걷기와 조용한 공간 체류가 스트레스 완화와 불안 감소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한 상담 전문가는 “사찰이나 계곡 같은 장소는 배경 소음이 자연의 소리로 채워져 있어, 생각을 비우는 연습을 하기 좋은 환경”이라고 설명하며, “짧은 여행이라도 반복될수록 정서적 안전지대가 넓어진다”고 느꼈다.

 

서원계곡은 이런 의미에서 속리산 여행의 또 다른 숨은 쉼터다. 장안면을 따라 흐르는 계곡 물줄기는 속리산 자락에서 내려온 맑은 물이 굽이치며 길을 만든다. 여름이면 짙은 초록 숲이 계곡 위로 그늘을 드리워 한낮에도 서늘함을 느끼게 하고, 가을에는 노랑과 빨강 단풍이 물 위에 비쳐 한층 더 깊은 색을 만들어낸다. 바위 위에 앉아 물 흐르는 소리를 듣다 보면, 시간 감각이 느슨해진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격한 등산이 아니라 산책에 가깝다. 아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가족, 카메라 하나 들고 풍경을 담는 여행자, 혼자 이어폰을 빼고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까지, 각자 다른 속도로 같은 길을 공유한다. 커뮤니티에는 “서원계곡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30분을 앉아 있었는데, 오랜만에 머리가 조용해졌다”는 후기가 이어진다.

 

이런 가을 여행지의 인기는 소비 방식의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숙박과 맛집에 집중하던 여행에서 벗어나, 이제는 ‘어디에서 쉬고 어떤 풍경을 보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효율적인 동선보다는 걷기 좋은 길, 화려한 액티비티보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장면을 고르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속리산과 법주사, 서원계곡처럼 자연과 시간이 함께 머무는 장소가 다시 주목받는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속리산 문장대에서 본 단풍을 못 잊어 매년 간다”, “법주사 마당에서 마셨던 따뜻한 차 한 잔이 유난히 기억난다”, “서원계곡 물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마음 정리를 했다고 고백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족과의 갈등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표현한다. 사람마다 사연은 달라도, “가을 보은 여행이 나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는 말은 묘하게 닮아 있다.

 

가을의 속리산과 법주사, 서원계곡은 거창한 이벤트를 준비하지 않는다. 그저 오래된 산과 물, 그리고 절이 제자리에서 계절을 맞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앞에 선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씩 달라진다. 바쁜 일상 속에서 아주 잠깐 물러나, 나뭇잎이 떨어지는 속도에 맞춰 숨을 고르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지금 이 변화는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나의 가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문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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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법주사#서원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