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기반 연구행정”…정부, 내년 최대 R&D 예산에 속도전
국가 연구개발 예산이 정점 경쟁에 접어들면서 관리 방식의 대수술이 요구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내년 정부 R&D 예산을 역대 최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대신, 인공지능과 데이터 기반의 연구행정 혁신을 병행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대형 기초연구와 첨단 산업기술 투자가 빠르게 확대되는 상황에서, 연구비 집행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관리 체계가 없으면 재정 투입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이번 행보를 한국형 R&D 매니지먼트 체제로의 전환 신호탄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2월 17일 대전 ICC 호텔에서 변화하는 연구행정, R&D 선진화를 위한 혁신을 주제로 2024년 연구행정 컨퍼런스를 열었다. 행사에는 대학과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자, 연구행정가, 정부 관계자 등 약 500명이 참석해 내년부터 확대되는 R&D 예산 구조에 맞는 새로운 관리 모델을 논의했다. 정부는 내년 국가 연구개발 예산을 사상 최대 규모로 편성한 만큼, 집행과 평가, 성과 확산까지 전 주기에 걸친 관리 고도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날 참석자들은 연구행정을 단순한 연구비 집행과 정산, 행정 지원 차원을 넘어 R&D 기획, 평가, 관리 전 과정을 아우르는 R&D 매니지먼트 개념으로 재정의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연구전략 수립에서 과제 발굴과 예산 배분, 윤리와 규정 준수, 성과관리와 확산, 연구환경과 시스템 구축까지 하나의 연속된 흐름으로 설계하는 통합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특히 ICT·바이오·우주·양자 등 고위험 고비용 분야 투자가 늘어난 만큼, 초기 기획 단계에서부터 리스크를 정량적으로 분석하고, 중간 성과를 데이터로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과기정통부는 연구전략 수립, 기획과 예산 집행, 윤리 및 규정 준수, 성과관리와 확산, 연구환경 및 시스템 구축을 R&D 기획·평가·관리 선진화를 위한 핵심 구성 요소로 제시했다. 이는 국내 다수 부처와 기관에 분산된 연구개발 사업을 동일한 기준으로 설계하고 평가하는 표준 프레임워크에 가깝다. 예를 들어 차세대 반도체나 AI 바이오 신약 개발 사업에서는 사업 선정 단계에서부터 목표 성과와 위험 요인을 수치화하고, 이후 데이터 기반 대시보드로 진행 상황을 관리하는 방식이 강조되고 있다. 기존처럼 사업 종료 후 정량 성과만 집계하는 사후평가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공정 중간에 방향 수정과 자원 재배분이 가능한 유연한 관리 모델을 지향하는 것이다.
민간과 연구현장의 사례 발표도 이어졌다. 김필석 SK이노베이션 최고기술책임자는 미국 에너지부 산하 고위험 에너지 연구기구 ARPA E에서 운영 중인 해외 연구행정 모델을 소개했다. ARPA E는 고위험·고수익 에너지 기술을 집중 지원하는 기관으로, 짧은 기간 안에 성과를 끌어내기 위해 프로젝트 단위 성과지표 설정, 단계별 평가와 중단 메커니즘, 전담 프로그램 매니저 활용 등 정교한 R&D 매니지먼트 체계를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에너지·소재·배터리 연구에 이러한 방식이 접목될 경우, 실패를 감수하면서도 도전적 과제를 밀어주는 투자 문화가 확산될 수 있다는 기대도 제기됐다.
김지현 연세대 교수는 현장 연구자가 경험한 연구지원 시스템의 문제점과 개선 제안을 공유했다. 복잡한 행정 절차와 중복 서류 요구, 획일적인 정량 평가가 연구 몰입을 저해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김성엽 울산과학기술원 교수는 연구현장에서 실제 적용 중인 R&D 매니지먼트 선진화 사례를, 박진섭 한국화학연구원 전략기획센터장은 기획 전문인력 운영을 통한 과제 기획·평가 역량 강화 모델을 각각 발표했다. 전담 기획 인력과 프로그램 매니저 제도를 통해 연구자는 과학적 내용에 집중하고, 기획과 관리 전문가는 사업 구조 설계와 이해관계 조정을 맡는 분업 체계를 구축해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정부는 이러한 민간 및 현장 제안을 제도 설계에 반영하기 위해 이달부터 분야별 릴레이 간담회를 이어가고 있다. 연구개발 기획, 성과와 평가, 연구관리, 성과 확산 등 세부 영역별 전문가를 초청해 난제를 정리하고, 새로운 연구행정 지원 정책 방향을 도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특히 인공지능과 디지털 전환 기술을 활용해 행정 업무를 자동화하고, 거대 R&D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과제 중복과 예산 낭비를 줄이자는 안이 논의 테이블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차원에서 보면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은 이미 데이터 기반 R&D 관리 체제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은 국가과학재단과 국립보건원 중심으로 통합 연구데이터 플랫폼을 운영하며, 반복 과제와 중복 투자를 줄이는 방향으로 평가 시스템을 개편 중이다. 유럽연합도 대형 연구 인프라와 공동 프로그램을 통해 회원국 간 데이터를 공유하고, AI를 활용한 과제 포트폴리오 분석을 강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방대한 국가연구개발 데이터가 축적됐지만, 여전히 부처별 시스템 분절과 표준 미비로 인해 정교한 분석과 전략 수립에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구혁채 과기정통부 1차관은 내년 정부 R&D 예산이 역대 최대 규모로 확대되는 상황을 언급하며 우리나라 R&D가 글로벌 최고 수준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행정 혁신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공지능 확산 등 급변하는 연구환경 속에서 전문적이고 투명하며, 객관적인 데이터에 기반한 R&D 관리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산 규모 확대 이상의 성과를 내려면, AI와 데이터 분석을 활용해 연구기획 단계의 전략성을 높이고 중간 점검과 성과 확산 과정을 정밀하게 설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산업계와 연구계에서는 내년부터 본격 추진될 연구행정 혁신이 실제 제도와 시스템으로 구현될지 주목하는 분위기다. 연구자가 행정 부담에서 벗어나 과학과 기술 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제도와 인력이 재편되지 않으면, 예산 확대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기술과 예산의 스케일 업 못지않게, 데이터 기반 R&D 매니지먼트와 책임 있는 거버넌스 구축이 새로운 성장의 조건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