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테크 부상에 긴장감 커진 한국 R&D 전략 재설계 요구
미국 중심의 글로벌 기술 질서가 중국의 첨단 기술 약진으로 빠르게 양극화·블록화되고 있다. AI와 양자기술 같은 미래기술을 둘러싸고 기술 패권과 공급망을 동시에 겨냥한 경쟁이 심화되면서, 기술과 산업이 맞물린 새로운 권력 구조가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통신장비, 배터리, 전기차, 드론 등에서 이미 핵심 플레이어로 올라섰고, 대규모 연구개발과 인력 투입을 바탕으로 미국과의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혀가고 있다. 국내에서는 중국의 레드테크 전략과 신형거국체제를 일정 부분 벤치마킹해, 한국형 혁신 생태계 재설계를 서둘러야 한다는 제언이 제기됐다.
오태석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원장은 25일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과 산업연구원이 공동 개최한 기술패권과 경제안보 시대의 혁신정책 대전환 포럼에서 기술과 산업의 융합 전략을 주제로 발표하며 이 같은 진단을 내놨다. 그는 최근 글로벌 기술환경이 기술 경쟁력뿐 아니라 공급망, 표준, 규범, 지정학을 포괄하는 복합 경쟁 구도로 바뀌고 있다고 짚었다. 특히 미국 중심의 개방형 기술 질서가 중국의 부상으로 흔들리며, 기술과 산업 네트워크가 양극화·블록화되는 체계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오 원장이 주목한 핵심 배경은 레드테크로 불리는 중국의 기술·산업 동시 부상이다. 레드테크는 중국이 국가 전략 아래 추진하는 첨단기술 산업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반도체와 배터리, 통신장비, 전기차, 드론, AI 등 전략 산업 전반을 포괄한다. 오 원장은 중국 기업들이 통신장비, 배터리, 전기차, 드론 등에서 이미 글로벌 시장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했다. 연구개발 투자 규모, 과학기술 인력, 특허와 혁신 역량 같은 양적·질적 지표에서도 미국을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이번 기술·산업 구조 변화는 기존 가치사슬의 형태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지적이다. AI와 양자기술, 우주 분야처럼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좌우하는 기술에서 기술 선점이 곧 공급망 통제와 표준 선점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강화되는 상황이다. 오 원장은 미래기술이 산업 가치사슬에 파급되면서, 특정 기술 하나의 경쟁력을 넘어, 연구개발·실증·상용화·확산 전 과정을 어떻게 설계하고 속도를 높이느냐가 승부처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오 원장은 중국의 혁신 전략을 한국이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중국은 신형거국체제로 불리는 국가 혁신 시스템을 기반으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대학, 기업이 하나의 전략 목표 아래 움직이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중국제조2025와 중국표준2035 같은 장기 로드맵을 중심에 두고 각 부문이 역할을 분담하며 실행력을 높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중국의 전략은 매우 구체적인 목표와 일정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추진되는 것이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연구개발부터 실증, 상용화, 시장 투입까지의 전 단계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보조금, 규제완화, 인프라 지원 등을 통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기술 개발 이후 초기 시장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공공 조달, 실증 단지 조성, 인허가 간소화 등 정책 도구가 유기적으로 결합돼, 기술과 산업이 동시에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오 원장은 한국도 이러한 정책 설계와 실행력 측면에서 중국의 신형거국체제를 선택적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 역시 세계 2위 수준의 연구개발 투자를 이어가며 대응 속도를 높이고 있지만, 가시적 성과가 부족하다는 내부 평가가 나오는 상황이다. 오 원장은 국내 구조적 한계로 기업 규모별 혁신 역량 불균형과 정부·민간 협력 부족을 꼽았다. 상위 10개 기업이 전체 기업 연구개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편중 구조 속에서, 다수 중견·중소기업은 기술·인력·자본 역량이 제한적이다. 이로 인해 연구개발 성과가 사업화와 시장 확산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같은 한계를 해소하기 위해 그는 산업 생태계 전반을 고려한 통합적 정책 설계를 제시했다. 개별 기술이나 특정 산업에만 초점을 맞추는 방식에서 벗어나, 글로벌 공급망의 전방·후방 구조, 기업 규모별 역할 분담, 핵심 인력 수급, 산학연 협력 네트워크가 어떻게 연결돼 작동하는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바탕으로 연구개발 전략, 산업 정책, 인력 양성, 지역 전략을 맞물리게 설계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구개발 성과의 확산과 스케일업도 핵심 과제로 꼽혔다. 오 원장은 글로벌 기술 경쟁의 승패가 이제 기술 개발 여부를 넘어, 개발된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산업과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연구개발, 실증, 상용화, 확산 단계 전체를 지원하는 전주기 지원 구조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단발적인 연구과제 지원에서 나아가, 산업적 성장 가능성이 있는 기술을 조기에 선별하고, 후속 투자를 체계적으로 연계하는 평가와 지원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설명이다.
민간 중심 혁신 구조를 뒷받침할 금융 생태계 구축도 중요한 축으로 제시됐다. 특히 우주, 양자처럼 개발 기간이 길고 기술 불확실성이 큰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정부와 민간이 리스크를 분담하는 구조가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오 원장은 전문 투자 인력을 육성하고, 장기·고위험 연구에 투자할 수 있는 정책 금융과 민간 자본의 결합 모델을 확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책 협력 기반 강화의 필요성도 강조됐다. 부처 간 칸막이를 최소화하고, 국내외 싱크탱크와의 협업을 통해 데이터 기반 정책 설계를 고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 구조, 기술 트렌드, 글로벌 공급망 변화 데이터를 통합 분석해 정책 방향을 수시로 점검하고 보완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를 통해 기술 정책과 산업 정책, 안보 전략 간 정합성을 높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오 원장은 지금을 글로벌 기술 권력이 재편되는 대전환기로 규정했다. 그는 한국이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연구개발과 산업 혁신을 통합하는 생태계 중심 접근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국내 산업계와 정책 당국은 레드테크로 상징되는 중국의 속도전에 대응해, 한국형 전주기 혁신 시스템이 실제 시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