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완화의료, 예술을 품다”…서울성모병원, 통합 돌봄 새 모델 제시
소아청소년 중증질환 치료 과정에 예술치유와 완화의료를 통합한 병원 모델이 주목을 받고 있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과 심장질환으로 5년간 투병한 10대 환아가 장기 입원 중 미술과 음악 활동을 이어가며 회복 과정을 기록했고, 퇴원 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공방을 열어 병동 경험을 작품으로 확장하고 있다. 병원이 제공한 통합 완화의료 서비스와 가족 조혈모세포이식이 결합된 사례로, 소아정밀의료와 정신·정서 지원을 결합한 차세대 케어 모델의 가능성이 부각된다는 평가다.
서울성모병원은 19일 소아청소년 혈액암 환아인 정서윤 양이 급성골수성백혈병과 발작성 상심실성 빈맥 치료를 마치고 예술 공방을 열었다고 전했다. 정 양은 초등학교 5학년이던 2021년 여름 고열로 응급실에 이송된 뒤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진단받았고, 무균병동 중심의 장기 입원 치료와 조혈모세포이식을 거쳤다. 치료 과정에서 감염 위험 관리, 고용량 항암제 투여, 심장 시술 등 고난도 의료 행위가 병행됐으며, 병원 내 소아청소년 완화의료팀 솔솔바람이 정서 지원과 가족 중심 통합 돌봄을 제공했다.

소아청소년 백혈병 치료는 항암요법과 조혈모세포이식, 감염 관리, 심장·간·신장 등 장기 기능 모니터링이 맞물리는 고위험 다학제 진료 영역이다. 특히 조혈모세포이식은 고용량 항암·방사선 치료로 환자의 골수를 비운 뒤 공여자의 조혈모세포를 주입해 새로운 조혈 기능을 재구축하는 고난도 시술로, 이식 후에는 급성·만성 이식편대숙주병, 중증 감염, 장기 손상 등 합병증 위험이 높다. 정 양은 6살 때 진단받았던 발작성 상심실성 빈맥이 항암치료 후 악화돼 심장 시술까지 병행해야 했고, 이는 치료계획 수립 과정에서 심장내과와 혈액종양내과의 협진을 요구하는 복잡한 임상 시나리오였다.
서울성모병원은 이러한 의료적 고난도 상황에 정서·심리 지원을 결합하기 위해 솔솔바람 팀을 운영하고 있다. 솔솔바람은 소아청소년 완화의료팀으로, 암이나 중증 희귀질환 환아를 대상으로 통증 관리, 증상 조절, 심리·정서 지원, 가족 상담을 통합 제공하는 팀이다. 코로나19 유행기 면회 제한 상황에서는 간호사가 환아 가족에게 치료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사진과 편지를 병실로 전달하는 등 비대면 정서 연결 기능도 수행했다. 의료진 설명에 따르면 정 양이 머물던 무균병동에서는 감염 위험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미술 도구와 물품이 매우 제한됐지만, 그 안에서 가능한 재료를 활용해 꾸준히 그림을 그리도록 돕는 것이 치료 순응도와 정서 안정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정 양은 조혈모세포이식과 회복기를 거치며 아크릴판에 가족과 의료진, 병동 환아를 그렸고, 미취학 환아에게는 로봇과 공룡, 청소년 환아에게는 인물 수채화 등을 선물했다. 장기 입원으로 한 번 입원 시 최소 수주에서 수개월 병원에 머무는 환경에서, 병동 아이들의 수액 폴대에는 정 양이 그려준 그림이 하나씩 걸리며 비의료적 동기 부여 요소로 작동했다. 병원 관계자들은 이러한 예술 활동이 환아에게는 자기표현이자 스트레스 완화 수단이 되고, 주변 환아에게는 투병 피로를 줄여주는 비약물적 중재 효과를 낸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 조혈모세포이식 후 2023년 재발은 환아와 가족 모두에 큰 심리적 충격을 줬다. 소아혈액암 재발은 치료 전략 재수립과 추가 이식 여부 검토 등 복잡한 의사결정을 필요로 하는 고위험 단계로, 생존율과 후유증 리스크 관리가 다시 논의되는 분기점이 된다. 재입원 기간 동안에도 정 양은 열이 나지 않는 시간에는 병동 친구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생일에는 작은 피아노 연주회를 열어 병동 휴게실을 소규모 공연 공간으로 전환했다. 가족과 의료진이 간식을 ‘입장료’처럼 들고 모여 서로의 투병을 응원하는 장면은 의료기관이 치료 공간을 정서 치유 공간으로 전환하는 사례로 해석된다.
정 양의 치료 과정에는 가족 조혈모세포 공여가 핵심 역할을 했다. 2022년 체중 30킬로그램이 채 되지 않던 남동생이 약 5시간에 걸친 조혈모세포 채집을 견뎌 첫 번째 이식에 공여자로 참여했고, 2023년 재발 후에는 어머니가 두 번째 이식 공여를 맡았다. 가족은 이 과정에서 생긴 흔적을 ‘영광의 상처’라 부르며, 남동생으로부터 이식받은 날을 ‘남매의 날’, 어머니로부터 이식받은 날을 ‘모녀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이처럼 가족이 치료과정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문화가 장기 치료 순응도와 회복 의지를 높인다고 보고, 소아 조혈모세포이식 프로그램 설계 시 가족교육과 심리지원 모듈을 강화하는 추세다.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소아청소년과 조빈 교수는 정 양 사례를 소아암 치료와 예술활동, 완화의료가 결합된 통합케어 모델로 평가했다. 조 교수는 오랜 치료 과정 속에서도 예술을 통해 자신과 주변을 위로해 온 환아가 자신의 이름을 건 공방을 연 것은 의료진 입장에서도 의미 있는 성과라며, 앞으로도 그림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며 건강하게 꿈을 키워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솔솔바람 팀의 최선희 전문간호사는 백혈병 치료 과정에서 감염 관리 때문에 미술 도구 사용이 까다롭지만, 정 양이 제한된 재료 안에서도 받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그림을 꾸준히 그려온 점에 주목했다.
의료계에서는 정 양 사례를 디지털 헬스케어와는 다른 궤도의 ‘아날로그 예술 기반 완화의료’ 사례로 보면서도, 향후에는 이 경험이 IT 도구와 결합해 확장될 여지도 있다고 본다. 정 양이 병동 경험을 웹툰으로 제작한 것은 소아암 환아 경험 데이터를 시각화한 것으로, 향후 병원 교육자료, 디지털 치료제형 콘텐츠, 가상현실 기반 입원 적응 프로그램 등으로 재가공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는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소아암 환아의 그림과 스토리를 데이터베이스화해 AI가 감정 변화를 분석하고, 정서 상태에 따라 맞춤형 상담과 콘텐츠를 추천하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정 양은 투병 기간 거의 5년 동안 학교에 정상적으로 다니지 못했으나, 입원 중에도 꾸준히 작품을 제작하고 작은 연주회를 여는 등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현재는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고 있으며, 치료 과정에서 만든 작품과 웹툰, 병동에서 그린 그림들은 자신이 연 미술공방에 전시했다. 앞으로는 공방에서 다양한 디자인 상품을 제작해 병동에서 나눴던 희망 메시지를 더 넓은 대중에게 전파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는 소아 완치자가 예술가이자 창업가로 성장하는 경로를 보여주며, 장기적으로는 소아암 생존자 지원 정책과 연계된 사회적 기업 모델로 발전할 여지도 있다.
정 양은 치료를 마치고 부산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느끼는 해방감을 가장 큰 행복으로 꼽았다.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 부산과 달리, 입원 중 병원 창밖으로 보이던 눈 내리던 날들을 특별한 기억으로 떠올리며 퇴원 후 병원 앞 시원한 바람만 맞아도 일상이 기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자신이 느낀 작은 행복을 그림으로 전하고 싶다는 그의 계획에 대해 의료계에서는 소아암 완치 이후의 삶을 어떻게 설계할지에 대한 대표적인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산업계와 의료계는 소아정밀의료, 완화의료, 예술치유가 결합된 이 모델이 향후 디지털 콘텐츠와 연계돼 확장될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