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고원에서 천천히 쉰다”…진안의 가을, 산과 카페와 캠핑 사이
고즈넉한 산골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멀고 한적한 시골’로 여겨졌던 곳이 이제는 숨을 고르고 마음을 식히러 가는 일상의 쉼터가 됐다. 전북 진안의 가을이 딱 그런 풍경을 품고 있다.
전라북도 동부의 고원 지대에 자리한 진안군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다. 해발이 높아 공기가 서늘하고 맑다 보니, 가을이면 색감이 유난히 또렷해진다. 붉고 노란 단풍이 계곡과 마을, 오래된 집과 학교 건물 사이를 천천히 물들이면서, 도시의 속도와는 전혀 다른 시간 감각을 건넨다.

진안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단연 마이산이다. 멀리서 보면 말의 귀처럼 뾰족하게 솟은 두 봉우리가 정겹게 서 있다. 산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다 뒤돌아보면, 고원 지대 특유의 넓은 하늘과 겹겹이 포개진 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을이면 봉우리 아래로 붉은 단풍이 흘러내리듯 번져 기암괴석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탑사에 들어서면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린 탑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 자연과 사람의 시간이 조용히 겹쳐지는 느낌을 준다. 누구와 함께 와도, 또 혼자여도,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지는 순간이다.
산을 내려와 따뜻한 한 모금이 그리워질 즈음 찾기 좋은 곳이 부귀면의 한옥 카페 다뭇이다. 270년 된 육송으로 지어진 한옥을 카페로 단장해, 대청마루와 기둥, 서까래에 세월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나무 특유의 향과 질감이 먼저 반긴다. 창호 너머로 들어오는 가을빛은 부드럽고, 잔잔한 음악 소리와 어우러져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분위기를 만든다. 정성스레 내려 준 커피와 차, 작은 접시에 담겨 나오는 디저트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 대신 그저 쉬어도 괜찮다는 허락처럼 느껴진다. 어느새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책을 펼치거나,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조금 더 색다른 감성을 원한다면 성수면의 카페마이산으로 발걸음을 옮겨볼 만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곳이 옛 좌산국민학교였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교실은 넓은 카페 홀로, 복도는 작은 갤러리와 휴식 공간으로 바뀌었다. 낡은 창틀과 칠판, 학교 사진이 남겨져 있어 학창 시절 기억을 자연스럽게 끌어올린다. 커피를 들고 교실 자리에 앉으면 마치 쉬는 시간 종이라도 울릴 듯한 기분이 든다. 창밖으로는 진안의 산과 들이 펼쳐져,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뛰놀던 풍경이 자연의 색채와 겹쳐진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학생이었던 나’로 돌아가는 경험이어서, 부모 세대는 향수를, 젊은 세대는 신선함을 느끼곤 한다.
하룻밤쯤은 자연 속에서 머물고 싶은 이들에게는 주천면 운일암반일암 국민여가캠핑장이 반가운 선택지다. 맑은 계곡물이 바로 옆을 흐르고, 바닥을 스치는 물소리와 숲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이어진다. 잘 정돈된 사이트와 깔끔한 샤워실, 온수 시설 덕분에 캠핑이 익숙하지 않은 초보 여행자도 부담을 덜 수 있다. 가을이면 주변 산들이 다채로운 색감으로 수놓아져, 텐트 문을 열기만 해도 한 폭의 풍경화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밤이 깊어질수록 별빛은 또렷해지고, 불빛을 최소한으로 줄인 캠핑장 풍경 안에서 사람들은 말수도 자연스럽게 줄인다. 불멍을 하며 앉아 있으면, 도시에서 미뤄 두었던 생각들이 차분히 떠올랐다가 또 조용히 흩어진다.
이런 진안의 가을 풍경은 요즘 여행의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빠르게 여러 곳을 찍고 돌아보는 일정 대신, 한 지역에 머물며 카페와 산, 계곡을 천천히 오가는 여행을 고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자연이 주는 위로와 오래된 건물의 온기를 동시에 느끼는 경험이, 지친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는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SNS에는 마이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한옥 카페 다뭇의 마루에 앉아 찍은 차 한 잔, 카페마이산 교실 한켠에서 찍은 책과 노트, 운일암반일암 국민여가캠핑장 불멍 사진이 차례로 올라온다. 댓글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온 게 제일 좋았다”, “하루 동안 휴대전화 거의 안 봤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거창한 액티비티보다, 아무 계획 없이 걷고 앉아 있고 바라보는 시간이 더 큰 만족을 준다는 반응이다.
여행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머무는 여행’이라고 부른다. 많이 보고 남기는 것보다, 몸과 마음의 속도를 맞추는 데 초점을 두는 방식이다. 진안처럼 산과 카페, 캠핑장이 가까운 거리에 모여 있는 곳에서는 이 리듬이 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아침에는 마이산을 산책하고, 낮에는 한옥 카페에서 쉬고, 저녁에는 계곡 옆 캠핑장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식이다. 하루의 동선은 짧지만, 마음속엔 오래 남는 풍경이 쌓인다.
사소한 선택 같지만, 이런 여행법 속에는 ‘어떻게 나답게 쉬고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누군가는 산길에서, 누군가는 오래된 학교의 교실에서, 또 누군가는 텐트 앞 의자에서 자기만의 호흡을 다시 찾는다. 고원 지대의 서늘한 바람과 고요한 밤, 따뜻한 한 잔의 온기가 그 여정을 조용히 돕는다.
작고 소박한 가을 여행이지만, 진안에서의 하루는 우리 삶의 속도를 조금씩 늦추는 연습이 돼 준다. 어쩌면 이 변화는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 이런 고요한 고원 마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