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된 산유국으로 돌아온다”…글로벌 석유사, 리비아 재진출 속도에 에너지 지정학 요동
현지시각 기준 23일, 북아프리카 산유국 리비아(Libya)에서 글로벌 메이저 석유사들의 석유 탐사권 입찰 참여 준비 소식이 전해지며,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약 15년간 사실상 중단됐던 대형 국제 유전 개발 사업이 재가동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이번 행보는 청정에너지 전환 속도가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는 가운데, 국제 에너지 시장과 중동·북아프리카 지역 지정학에 직접적인 파장을 낳고 있다.
현지 언론 보도와 영국(UK)의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쉘(Shell), 셰브론(Chevron), 토탈에너지스(TotalEnergies), 에니(Eni), 렙솔(Repsol) 등 주요 글로벌 석유 기업들이 리비아 정부가 추진하는 신규 석유 탐사권 입찰에 참여하기 위한 사전 자격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비아가 석유 탐사권을 국제 입찰에 부치는 것은 약 18년 만으로, 메이저 석유사들의 본격적인 복귀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앞서 쉘과 BP는 지난 7월 리비아 국영석유공사(NOC)와 석유·가스 탐사 기회 평가를 위한 협약을 체결하며 리비아 재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FT는 이 협약이 글로벌 석유업계의 리비아 복귀 움직임을 촉발한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엑손모빌(ExxonMobil) 역시 지난 8월 리비아 연안 가스 탐사 계약을 체결해, 주요 국제 석유사들이 잇따라 리비아 에너지 자원 확보 경쟁에 합류하는 양상이다.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는 재생에너지와 전기차 확산에도 불구하고, 세계 원유 수요가 예상보다 장기간 견조한 흐름을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이 같은 인식 속에 대형 에너지 기업들은 대규모 매장량을 보유한 산유국에서 장기 공급 기반을 다시 다지려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는 평가다. FT는 풍부한 매장량과 지중해 연안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갖춘 리비아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전했다.
에너지 금융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FT에 “대형 석유 기업들이 검증된 지역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말하며, 이들 기업이 정치적 리스크가 상존하는 국가에서 사업을 운영해 온 경험을 다수 축적해 왔다고 설명했다. 국제 메이저 석유사가 복귀하면 리비아 정부가 원유 생산 확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술·자본 측면의 뒷받침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중장기 공급 능력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리비아는 2011년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정치적 분열과 내전이 이어지며 에너지 산업이 심각한 차질을 겪었다. 현재 리비아는 유엔(UN)이 인정하는 서부 소재 통합정부(Government of National Unity, GNU)와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이 이끄는 리비아국민군(LNA)을 지지 기반으로 한 동부의 국가안정정부(Government of National Stability, GNS)로 양분된 상태다. 유전과 수출 인프라 상당수가 동부 지역에 위치해 있어, 정유·수출 허가권과 수익 배분을 둘러싼 갈등이 상시적 위험 요인으로 거론돼 왔다.
FT에 따르면 수도 트리폴리(Tripoli)에 기반을 둔 통합정부는 원유 생산 증대를 핵심 국정 과제로 제시하고, 2030년까지 하루 평균 원유 생산량을 현재 약 140만배럴 수준에서 200만배럴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 같은 목표 달성을 위해 통합정부는 국영석유공사를 중심으로 해외 메이저 석유사 유치에 힘을 쏟는 한편, 신규 탐사권 입찰을 통해 추가 유전 발굴과 기존 유전의 회복·증산을 추진하고 있다.
통합정부는 글로벌 관심 제고와 투자 유치를 위해 이번 주 미국(USA) 워싱턴(Washington)을 방문해 미 정부 및 에너지 업계 관계자들과 접촉에 나섰다. FT는 통합정부 대표단이 미국 측을 상대로 리비아가 향후 석유와 가스의 주요 공급국으로서 역할을 확대할 수 있다며, 리비아 에너지 부문에서 러시아(Russia)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국내 정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미국의 외교·투자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오랜 기간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과 동부 진영을 지원해 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FT는 리비아의 상당한 석유 매장량이 하프타르 장군 측이 통제하는 동부 지역에 집중돼 있다고 지적하며, 향후 탐사·생산 프로젝트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미국 간 영향력 경쟁이 더욱 가팔라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 같은 구도는 리비아 내부 정치 합의뿐 아니라, 글로벌 에너지 질서를 둘러싼 미·러 간 힘겨루기와도 맞물려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제 에너지·증시 시장에서는 메이저 석유사의 리비아 복귀가 중장기적으로는 글로벌 원유 공급 기반 확대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다만 리비아 정치 상황의 불확실성과 동·서 정부 간 권한 다툼, 외세 개입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가 여전히 크다는 점에서, 실제 생산 증가가 목표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로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청정에너지 전환 지연 속에 전통 화석연료 투자와 생산 확대 시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리비아를 둘러싼 정치·군사 리스크와 미·러 경쟁이 글로벌 에너지 시장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고 분석한다.
국제사회는 리비아가 추진하는 석유 탐사권 입찰과 메이저 석유사의 참여가 실제 생산 증대와 정치 안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나아가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