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K자형 경제로 중산층 압박”…미국, 소득·소비 양극화 심화에 트럼프 선거 전략 흔들려

허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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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기준 7일, 미국(USA)에서 소득과 소비 양극화가 심화하는 이른바 ‘K자형 경제’가 다시 부각되면서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정치 지형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팬데믹 이후 성장을 뒷받침해 온 고용·소득 지표가 계층별로 상반된 흐름을 보이면서, 경제 성과를 내세워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전략에도 변화 압박을 가하는 분위기다.

 

영국(UK)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7일(현지시각) 보도에서 최근 미국 경제가 계층별로 완전히 다른 경로를 보이는 ‘K자형 경제(K-shaped economy)’ 양상이 한층 뚜렷해졌다고 지적했다. 취약한 고용 시장과 여전히 높은 물가 수준이 겹치며 최상위 소득 계층과 최하위 소득 계층 사이의 격차가 다시 크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FT는 이러한 흐름이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던 성장·고용 지표를 오히려 정치적 위험 요인으로 바꾸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K자형 경제 양극화 심화…소득·소비 격차, 트럼프 중간선거 부담 부각
미국 K자형 경제 양극화 심화…소득·소비 격차, 트럼프 중간선거 부담 부각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이 미국 노동통계국 자료를 분석한 결과, 최하위 소득 계층의 임금 상승률이 최상위 소득 계층보다 더 크게 둔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0년 동안 점차 좁혀지던 계층 간 임금 격차가 최근 들어 상당 부분 되돌려지며 다시 벌어지는 흐름이 포착됐다는 설명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임금 분포 변화가 최근 미국 노동시장 약화의 충격이 저소득층에 더 크게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진단했다.

 

미국외교협회(CFR)의 레베카 패터슨 선임 연구원은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율이 과거보다는 낮아졌지만, 저소득층 생활 여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임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임금이 실질적으로 개선되려면 강한 고용 창출과 낮은 실업률이 뒷받침되는 ‘강력한 노동 시장’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며, 현재의 구조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K자형 경제’라는 개념은 2020년 미국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부유층과 빈곤층의 회복 속도가 극명하게 갈리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고소득층은 자산 가격 상승과 재택근무 확대로 빠른 회복을 누린 반면, 저소득층은 일자리 상실과 소득 감소가 누적되며 경제적 어려움이 악화되는 상반된 흐름이 전형적인 K자형 패턴으로 제시됐다. 최근 통계는 이러한 구조가 완화되기보다 되레 재강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소득 분포의 격차는 소비 행태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블룸버그 통신은 최근 보도에서 미국 내 소득 계층 간 ‘소비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K자형 경제에 대한 우려가 다시 고조되고 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소비 지출은 상위 10%에 해당하는 부유층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으며, 이들 소득 그룹이 전체 소비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주식 시장과 주택 가격 상승의 직접적인 수혜를 보는 고소득층은 지출 여력을 유지한 채 소비를 확대하는 반면, 저소득층은 인플레이션과 고용 시장 위축에 직면해 필수 지출마저 줄이는 상황에 놓였다는 평가다.

 

패터슨 연구원은 현재 미국 성장 동력이 인공지능(AI) 및 AI 관련 자본 투자에 크게 의존하면서 특정 기업군에 부가 집중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세계 최대 경제인 미국이 소수의 수십 개 기업에 성장을 의존하는 구조는 산업과 고용 측면에서 리스크가 크고, 소득 분배 악화를 심화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이 같은 성장 패턴은 저소득·중산층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정치·사회적 긴장을 키우는 배경으로도 해석된다.

 

FT는 이런 계층 간 격차와 소비 분화가 정치 지형에도 반영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제·물가 이슈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핵심 경합주 펜실베이니아주를 9일 방문해 경제 정책 비판에 대응하는 메시지를 내놓을 것으로 전망된다. FT는 트럼프 대통령이 경제 성과를 강조하는 기존 메시지에 더해 생활비 부담 완화 방안을 전면에 내세우며 불만 누그러뜨리기에 주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가계의 생활비 부담을 가리키는 ‘affordability(감당 가능성)’라는 표현에 대해 “가장 큰 사기(the greatest con job)”라고 규정하며 민주당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그는 민주당이 생활비 부담 문제를 반복적으로 거론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반격에 나섰다. 동시에 물가 상승 비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농축산물 가격 안정과 관세 정책을 활용한 조치를 연이어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4일 소고기, 커피, 토마토, 바나나 등 일부 농축산물을 상호관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또 지난달 7일에는 육가공업체들이 소고기 가격을 담합했는지 여부를 조사하라고 법무부에 지시하며 식품 가격 안정에 대한 대응 의지를 부각했다. 이달 7일에는 관세 수입을 활용해 고소득층을 제외한 모든 국민에게 2천달러 배당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거론하면서 “중산층과 저소득층을 위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러한 메시지는 인플레이션과 소득 정체로 부담이 커진 중산층·저소득층 유권자를 겨냥해 경제 성과와 생활비 지원 의지를 동시에 부각하려는 정치적 시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미국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경기 상황은 각종 지표에서 악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 민간 경제조사단체 콘퍼런스보드는 11월 미국 소비자신뢰지수가 기준치 100(1985년=100)에서 88.7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11월 지수는 전월보다 6.8포인트 하락해 지난 4월 이후 7개월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생활비 부담, 고용 불안, 향후 경기 둔화 우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FT는 특히 미국 내 히스패닉 노동자 계층에서 고용 불안이 심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대선 당시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히스패닉 노동자의 실업률은 9월 5.5%까지 상승해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같은 달 미국 전체 실업률이 4.4%로 집계된 점을 고려하면, 히스패닉 계층 실업률은 평균을 뚜렷하게 웃도는 수준이다. 전통적으로 저임금·서비스업 비중이 높은 이 계층이 노동시장 약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최근 지방선거 결과도 이런 경제적 불만이 정치적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FT는 지난달 뉴욕시장을 포함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배경에 높은 물가와 고용 불안 등 경제 전반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온다고 전했다. 생활비와 일자리 문제를 둘러싼 민심 이반이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 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제적으로도 미국의 K자형 경제 심화는 글로벌 경기와 금융 시장에 파급력을 지닌 변수로 주목받고 있다. FT와 블룸버그 등 주요 매체는 미국 내 소비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는 상위 계층 지출이 유지되는 동안, 광범위한 중·저소득층의 구매력 약화가 장기 성장의 제약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간선거 과정에서 재정 지출 확대나 관세 정책 변경 등 정치적 대응이 강화될 경우, 국제 교역과 자본 흐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관측이 뒤따른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K자형 경제 구조가 완화되지 않을 경우, 경제 양극화와 생활비 부담이 앞으로도 미국 정치의 핵심 쟁점으로 남을 것으로 보고 있다. 소득과 소비의 분화가 심화될수록 계층별 정책 수요가 극단적으로 갈리면서 정치 양극화가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미국이 어떤 방식으로 성장 과실의 분배 구조를 조정할지,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중간선거와 향후 대선 결과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 국제사회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허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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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대통령#미국k자형경제#중간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