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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중복규제 우려 커지자…기본법 시행전 정비 요구

이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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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기술이 의료와 금융, 채용과 콘텐츠 등 전 산업에 스며들면서 규제 체계도 복잡하게 얽히고 있다. 내년 1월 인공지능 기본법 시행을 앞두고 동일한 AI 시스템이 여러 부처의 서로 다른 규제를 동시에 적용받는 구조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분위기다. 기술 활용 맥락은 하나인데 법적 잣대가 제각각이라면 기업의 규제 부담과 법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결과적으로 AI 기술 발전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업계와 법조계에서는 이번 기본법 시행을 계기로 AI 규범을 기능적으로 정합화하는 거버넌스 개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18일 고려대학교 기술법정책센터가 개최한 세미나에서 집중 제기됐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강정희 변호사는 AI 거버넌스 개편과 인공지능 기본법 시행에 따른 정책 과제를 주제로 발표하면서, 현행 규제 체계가 하나의 AI 시스템을 둘러싸고 여러 부처가 각자 다른 시각에서 규제를 부과하는 구조라고 진단했다. 내년부터 기본법이 발효되면 규제 총량이 더 늘어날 수 있는 만큼, 시행 전 정합성 점검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강 변호사는 현재 구조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산업·기술 총괄,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데이터 규율,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의 미디어·콘텐츠 영역 AI 규제, 공정거래위원회의 경쟁과 공정성 규제라는 네 갈래로 요약했다. 모두 동일한 AI 시스템을 겨냥하지만 초점이 다른 만큼, 기업 입장에서는 어느 기관의 기준을 우선순위로 삼아 설계와 운영을 조정해야 할지 판단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규제 목적과 판단 기준이 상충하는 지점이 발생할 경우, 기업은 복수의 감사와 제재 리스크를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된다.

 

강 변호사는 인공지능이 본질적으로 융합 기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AI가 의료 분야에서는 진단 보조나 예후 예측에 활용되고, 금융에서는 신용평가와 이상 거래 탐지에, 채용에서는 서류·면접 평가에, 콘텐츠에서는 생성과 유통 자동화에 쓰이면서 각 영역의 개별 법률 적용을 피할 수 없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다만 여러 법이 병렬로 적용되더라도 중복 규제가 과도해지지 않도록, 인공지능 기본법과 기존 개별 법령 사이의 연계 규정을 보다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강 변호사는 인공지능 기본법을 둘러싼 논의가 규제 공백이나 소비자 보호 부족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흐름을 경계했다. 그는 소비자 보호를 강화하려는 취지로 새로운 규제 조항을 계속 덧붙이는 방식이 오히려 현장에서는 규제 충돌과 혼선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데이터 처리와 알고리즘 투명성, 차별 방지, 안전성 확보 등 여러 가치가 법제화되는 과정에서, 각 부처가 관할 권한을 확장하려 할수록 기업은 복잡한 규제 지도를 해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토론에 나선 네이버 법무실의 김지식 실장도 현장의 부담을 거론했다. 그는 동일한 AI 시스템이 과기정통부, 개인정보위, 방통위, 공정위 등 여러 기관의 기준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구조가 기업에 상당한 법적 불확실성을 낳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불확실성은 곧 내부 규정 정비와 외부 자문, 모니터링 비용으로 이어져 컴플라이언스 비용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리는 요인이 된다고 분석했다. 서비스 기획 단계부터 법령 해석과 규제 리스크 검토에 많은 자원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이미 개인정보 보호나 사이버보안, 전자금융, 의료법 등 개별 법령에서 상당 수준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사업자에 대해, 인공지능 기본법이 동일한 취지의 의무를 중복 부과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기존 법령에서 일정 요건을 충족한 기업에 대해서는 기본법상 반복되는 의무를 면제하거나 경감하는 방식의 조정 장치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야 기업들이 추가 규제에 대한 막연한 우려 대신, 실제 필요한 안전성과 신뢰성 확보 조치에 집중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국내외 경쟁 환경도 변수로 거론됐다. 김 실장은 국내 사업자가 해외 빅테크와 같은 글로벌 사업자보다 더 촘촘한 규제를 적용받는 구조가 형성될 경우, 결과적으로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는 거대 플랫폼이 막대한 자본과 인력으로 규제 대응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반면, 국내 기업은 상대적으로 제한된 자원으로 다층적인 규제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처지라는 것이다. 그는 규제 체계가 국내 기업을 불리하게 만들지 않도록 시행령과 하위 규정 단계에서 세밀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인공지능 기본법을 AI를 둘러싼 모든 문제를 일괄 해결하는 만능 규범으로 보기보다는, 데이터와 개인정보, 사이버보안, 콘텐츠, 경쟁 정책 등 기존 법체계와 기능적으로 정렬시키는 상위 프레임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규제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와 함께, 이미 존재하는 규범과의 중복과 충돌을 줄이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기술 활용 현장에서는 불확실성만 커질 수 있다는 평가다. 산업계는 내년 기본법 시행 이후 후속 시행령과 부처 간 협의 구조가 실제 시장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을지 주시하고 있다.

이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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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기본법#강정희#네이버법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