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증원보다 사실심 인력 확충"…사법개혁 해법 놓고 법원·시민사회 격돌
재판 지연을 둘러싼 책임 공방과 해법 논쟁이 사법부 안팎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연 사법제도 개편 공청회 첫날, 법원은 사실심 인력 확충과 법관 처우 개선을 해법으로 제시했고, 시민단체는 정치권의 대법관 증원 논의를 정면 비판하며 사법개혁 방향 수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법원행정처는 9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청심홀에서 법률신문과 함께 국민을 위한 사법제도 개편: 방향과 과제를 주제로 공청회를 열고 우리 재판의 현황과 문제점을 놓고 첫 번째 세션을 진행했다. 사흘 일정으로 마련된 공청회 첫 세션부터 재판 지연, 법관 증원,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등 굵직한 쟁점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발표자로 나선 기우종 서울고등법원 인천재판부 고법판사는 최근 재판 지연 심화를 수치로 제시하며 사법개혁의 초점을 재판 속도 회복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 판사는 "2010년대 중반까지는 효율성 중심의 사법절차로 민사와 형사 재판의 신속성이 매우 우수한 편에 속했으나, 이후 점차 재판의 속도가 느려져 어느덧 재판 지연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됐다"고 말했다.
법원 통계에 따르면 1심 민사합의 사건의 평균 처리기간은 2017년 293.3일에서 2024년 437.3일로 49퍼센트 늘었다. 같은 기간 1심 형사합의 사건은 150.8일에서 198.9일로 31퍼센트 증가했다. 기 판사는 행정처 사법지원실장을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코로나19 영향과 함께 고난이도·고분쟁성 복잡 사건의 증가, 법관 평균연령 증가로 인한 사건처리 효율성 저하가 2020년대 이후 재판 지연의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해법으로는 사실심 인력과 자원 확충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국민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대부분의 사건은 1심과 2심, 즉 사실심에서 결정된다"며 "국민의 사법 신뢰를 위해서는 재판지연 해소가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보이스피싱 사건처럼 법정형 상향으로 합의부 관할이 된 형사사건의 단독 관할화 입법, 시니어 법관 제도 도입, 사법보좌관 업무범위 확대 등을 구체 방안으로 제안했다.
토론에 나선 공두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재판 지연의 구조적 배경을 인사 정책에서 찾았다. 그는 2018∼2019년 법관임용자격의 법조경력이 대폭 상향되면서 신규 임용이 급감한 반면, 2020년대 들어 퇴직 법관 수는 크게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공 교수는 "재판지연을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지속적인 법관 증원"이라며 법관 수 확대와 인력 구조 개선을 촉구했다.
판사 출신인 공 교수는 후속 법조 세대 양성 관점도 함께 제시했다. 그는 "법관 신규임용 절차를 다변화하고, 대규모 법관 신규임용을 위해 법관 후보군을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한다"며 "동시에 법관이 긍지와 보람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법원을 더욱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력 숫자뿐 아니라 법관직의 매력을 높이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김기원 변호사이자 서울지방변호사회 수석부회장도 법관 정원 확대와 처우 개선에 힘을 실었다. 김 변호사는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는 법관 정원을 늘려 법관 1인당 업무량이 적정하게 조정돼야 한다"며 재판부 과부하가 사법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법관 처우를 대폭 상향해 최우수 인재가 법관직에 투신해 장기근속할 유인이 필요하다"며 "반면 공정성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역량이 일정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 재판 업무에서 배제하고 다른 직무로 전환하거나 면직을 유도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는 대법관 증원 중심으로 흐르는 정치권 논의를 정면 겨냥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시민입법위원장인 정지웅 변호사는 "지금 우리 사법부는 동맥경화에 걸려 있는데 정치권에서는 엉뚱한 처방전을 내놓고 있다"며 대법관 증원에 무게를 둔 사법개혁 방향을 비판했다. 그는 "재판지연의 병목 현상은 대법원이 아니라 1심과 2심, 즉 사실심에서 발생하고 있다"며 "우리 사법 시스템의 진짜 문제는 사실심 부실화와 지연에 있다"고 지적했다.
정 변호사는 "이런 상황에서 대법관 수만 대폭 늘리면 가뜩이나 힘겨운 하급심의 인력 공동화를 가속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이어 "1심 재판부는 경력이 짧은 판사들로 채워지고, 재판의 질은 더 떨어질 것이며 불복률은 높아져 상고심 사건은 더 폭증하는 악순환이 불 보듯 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법개혁의 최우선 순위는 대법관 증원이 아니라 사실심 법관의 대폭적인 증원과 재판 지원 인력의 확충"이라며 "예산과 인력을 머리가 아닌 손발에 집중해달라"고 강조했다.
여권에서 추진 중인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방안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정 변호사는 "특정 정치적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입맛에 맞는 특정 성향의 판사들로 구성된 재판부를 만든다면 그 재판부에서 내려진 판결을 국민들이 공정한 법의 심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만약 이번에 내란전담재판부를 허용하면 다음 정치권에서는 가령 선거사범 전담부, 대형재난사건 전담부를 만들라고 요구할 것"이라며 "그때마다 사법부는 정치권의 요구에 따라 재판부를 만드는 정치적 하청기관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법부 수장급 인사는 국민 불신을 직시하며 공청회 결과를 제도 개선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 겸 대법관은 "많은 국민들이 사법에 대한 높은 불신을 보여주고 있다"며 "공청회에서 여러 전문가와 시민들이 들려주시는 귀한 목소리를 경청할 것이고, 사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찾는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다.
법원행정처는 11일까지 사흘간 공청회를 이어가며 재판 지연 해소, 법관 증원, 대법원과 하급심 기능 조정, 정치적 사건 재판부 구성 방식 등을 두루 논의할 계획이다. 정치권에서 추진 중인 사법개혁 법안과 맞물려 공청회 논의가 향후 입법 방향과 사법부 자체 개혁 로드맵에 어떤 영향을 줄지 주목된다. 국회는 공청회 과정에서 제기된 쟁점을 바탕으로 다음 회기에서 사법개혁 관련 법안 논의에 본격 착수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