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복종 의무 대신 법 준수”…정부, 국가공무원법 76년 만에 대수술

허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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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복종 문화를 둘러싼 갈등이 제도 개편 국면으로 옮겨가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제기된 공직사회 통제 방식 논란이 국가공무원법 전면 손질로 이어지면서, 위법한 지시에 맞선 공무원의 책임과 권한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도 재점화될 전망이다.

 

인사혁신처는 25일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다고 밝혔다. 1949년 법 제정 당시 도입된 공무원의 복종 의무 조항을 76년 만에 손질해 표현을 삭제하고, 위법한 지휘에 대한 이행 거부 절차를 담는 내용이 핵심이다.

현행 국가공무원법 제57조는 상급자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할 의무를 규정해 왔다. 그동안 행정 조직의 효율적·통일적 운영을 이유로 문구가 유지됐지만, 상관의 부당하거나 위법한 명령에 대해 공무원이 사실상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특히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를 계기로 비상 상황에서의 명령 체계가 여과 없이 작동할 경우 인권 침해와 권한 남용을 막을 안전장치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커졌다. 이에 따라 인사혁신처는 복종 의무를 순화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검토해 왔다.

 

최동석 인사혁신처장은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국민에 대한 책임을 우선하는 공직사회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국회에서 국민에게 충직한 공직사회 구현을 위해 명령과 통제에 기반한 복종의 의무를 개선하고 상관의 위법한 지휘와 명령에 대한 불복 절차를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국가공무원법 제57조의 복종의 의무 표현은 지휘·감독에 따를 의무 등으로 대체된다. 동시에 구체적인 직무 수행 과정에서 상관의 지휘·감독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권한을 명문화하고, 해당 지휘·감독이 위법하다고 판단될 경우 공무원이 이행을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의견 제시나 이행 거부를 이유로 해당 공무원에게 인사상 불이익 등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도 신설된다. 사실상 위법한 명령에 대한 거부권과 내부 이의제기 절차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가 마련되는 셈이다.

 

공무원의 기본 의무 규정도 정비된다. 제56조의 성실의무는 법령준수 및 성실의무로 바뀐다. 개정안은 공무원이 국민 전체의 봉사자로서 법령을 준수하며 성실히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명시해, 복종이 아니라 법과 국민에 대한 책임을 기준으로 직무 윤리를 재정립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인사혁신처는 개정 취지를 공직사회 문화 전환으로 설명했다. 인사혁신처는 개정안은 공무원이 명령과 복종의 통제 시스템에서 벗어나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리적으로 의사를 결정해나가도록 하는 한편, 상관의 위법한 지휘·감독에 대해선 이행을 거부하고 법령에 따라 소신껏 직무를 수행해야 함을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법 개정안은 공직사회 노동 환경과 관련된 복지·징계 제도도 폭넓게 손본다. 우선 육아휴직 대상 자녀의 나이 기준을 현행 8세 이하에서 12세 이하로 상향한다. 학령기 자녀 돌봄 수요가 커지는 현실을 반영해 부모 공무원의 육아 부담을 덜겠다는 취지다.

 

난임 휴직도 별도의 휴직 사유로 신설된다. 난임 치료 과정에서 휴식과 치료 기간을 보장하기 위해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허용하도록 규정해, 공직사회 내에서 출산·양육 친화 환경을 강화하는 조치로 해석된다.

 

한편 스토킹이나 음란물 유포 등 성 관련 비위에 대한 징계 절차는 크게 강화된다. 개정안은 해당 비위에 대한 징계 시효를 기존 3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비위 혐의자에 대한 징계 처분 결과를 피해자가 통보받을 수 있도록 했다. 피해자 권리 보호를 확대하고, 공무원 성비위에 대한 강력한 제재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최동석 처장은 공무원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은 국민의 삶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 질 좋은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기본적인 일이라고 강조했다. 공직사회가 명령 중심 조직문화를 벗어나 법과 국민에 대한 책임을 우선하는 구조로 전환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정부는 입법예고 기간 동안 관계 부처와 공직사회, 시민사회의 의견을 수렴한 뒤 국회에 개정안을 제출할 방침이다. 국회는 관련 상임위원회 논의를 거쳐 계엄 사태 재발 방지와 공무원 노동·징계 제도 개선 방향을 두고 여야 간 치열한 공방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며, 향후 회기에서 본격 논의에 나설 계획이다.

허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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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혁신처#국가공무원법#최동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