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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망가진다며 말렸다"…한덕수, 내란 재판서 윤석열 계엄선포 만류 주장

정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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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재판을 둘러싼 책임 공방 속에서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 윤석열 전 대통령이 다시 맞섰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과정을 두고 한 전 총리가 재판에서 만류 노력을 강조하면서도, 헌법재판소에서의 위증 사실은 인정해 정치권 파장이 커지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 이진관 부장판사는 24일 한 전 총리의 내란 우두머리 방조 및 중요임무 종사 혐의 사건 속행 공판을 열고 피고인 신문을 진행했다. 피고인 신문은 증거조사 종료 뒤 검찰과 변호인이 피고인에게 공소사실과 양형 관련 사항을 묻는 절차다.

한 전 총리는 재판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움직임을 전해 듣고 강하게 만류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전 대통령으로부터 '지금 들어와 달라. 주위에는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대통령실에 도착해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계획을 들은 상황을 설명했다. 한 전 총리는 "너무 깜짝 놀라서 '우리나라의 대외신인도가 떨어지고 경제가 정말 망가질 수 있습니다. 이건 굉장히 중대한 일입니다. 재고해 주십시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직접적으로 반대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대외신인도와 경제 충격을 거론하며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한 전 총리는 국무회의 소집을 건의한 배경에 대해서도 "더 많은 국무위원을 통해 반대 의견을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국무위원들이 모인 뒤에는 비상계엄에 강하게 반대한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당신도 대통령 집무실에 좀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 봐라"는 취지로 말한 사실도 언급했다.

 

재판부는 한 전 총리의 행동이 계엄 저지 의사와 부합하는지 따져 물었다. 이진관 부장판사는 "피고인이 비상계엄을 막을 의사가 있었다면 다른 국무위원들이 재고해달라는 말을 할 때 함께 호응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가만있었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한 전 총리는 "두 번 정도 집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만류하는 입장을 계속 전달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상목 전 부총리, 조태열 전 외교부 장관 등 연륜 있는 분들이 말씀해주는 게 좋지 않나 생각했다"며 "지금 돌아보면 저도 좀 더 열심히 합류해서 행동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계엄 저지 의도가 있었다고 강조하면서도 행동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병행한 셈이다.

 

대통령실 폐쇄회로TV 영상에 포착된 장면들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앞서 공개된 영상에는 한 전 총리가 문건 두 개를 들고 이동하는 모습과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과 나란히 앉아 문건을 보며 16분간 대화하는 장면이 담겼다.

 

한 전 총리는 문건을 들고 있던 장면과 관련해 "대통령으로부터 계엄에 대한 얘기를 듣고서부터는 어떤 경위를 거쳐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부족하다"고 했다. 이어 "거의 '멘붕' 상태에서 무언갈 보고 듣기는 했지만 제대로 들어와서 인지된 상황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과의 대화에 대해서도 기억 상실을 주장했다. 그는 "이 전 장관과 대화를 한 것을 이번에 영상을 보고 알았다"며 "대화를 한 기억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다만 "행안부가 가지는 기능, 예를 들면 질서유지라든지 국민 생활 안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라고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기억은 있지만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문건 처리 과정도 도마 위에 올랐다. 한 전 총리는 지난해 12월 8일께 강 전 실장에게 사후 서명한 비상계엄 선포문 폐기를 요청한 이유에 대해 "사후적으로 사인을 한 것이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해당 선포문을 대통령기록물로 보지는 않았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문건 파쇄를 둘러싼 진술 번복과 헌법재판소 위증 문제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특검팀이 "대통령실로부터 받은 문건을 파쇄한 게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위증했다고 수사기관에서 진술했는데 맞느냐"고 묻자, 한 전 총리는 "네. 제가 헌재에서 위증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재판 말미에 한 전 총리는 정치적 책임을 언급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위헌·위법한 비상계엄을 국정을 총괄하는 국무총리로서 막지 못한 데 대해 정치적인, 역사적인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겠지만, 계엄을 막지 못해서 국민들에게 큰 어려움을 준 사안에 대해서는 큰 멍에로 알고 살아가도록 하겠다"고 했다.

 

재판부는 26일 특검팀의 구형과 한 전 총리의 최후 진술을 듣는 결심공판을 열 예정이다. 이날 재판이 마무리되면 한 전 총리에 대한 1심 판단이 나오는 수순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정치권과 법조계는 향후 판결 내용에 따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책임 범위와 내란 사건 수사의 향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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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윤석열#비상계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