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 대신 흙길을 걷는다”…고창에서 찾는 조용한 가을 휴식
요즘 가을 휴가를 멀리서 찾기보다, 조용한 농촌 마을로 향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볼거리’가 여행의 기준이었다면, 지금은 천천히 걷고 쉬어 갈 수 있는 ‘머무름’이 더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고 있다. 사소해 보이는 이동이지만, 그 안에는 달라진 여행의 마음가짐이 담겨 있다.
전라북도 서남부에 자리한 고창군은 이런 변화를 고요하게 품고 있는 곳이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청정한 자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 유적지까지, 이미 잘 알려진 명소도 많지만 요즘 여행자들이 눈여겨보는 곳은 따로 있다. 꽃이 피고 지는 속도를 따라 계절이 달라지고, 그 풍경을 통째로 앉아서 바라볼 수 있는 정원과 카페, 그리고 마음을 놓아둘 수 있는 치유 공간들이다.

가장 먼저 발길이 향하는 곳은 공음면의 청농원이다. 2만여 평에 달하는 넓은 정원에는 라벤더와 핑크뮬리가 계절을 나눠 물들인다. 가을이면 분홍빛 핑크뮬리가 바람에 서서히 눕고 일어서며 물결을 만든다. 그 뒤편으로는 술암제 한옥이 고즈넉하게 자리해 풍경에 시간의 깊이를 더한다. 소나무 숲길과 대나무 숲을 걸을 때마다 바람 소리, 풀잎 스치는 소리가 귀에 먼저 들어오고, 반려견과 함께 뛰노는 가족들의 웃음이 한켠을 채운다. 곳곳에 놓인 안내문을 따라가다 보면 동학농민운동의 역사를 담은 사발통문 이야기도 만날 수 있어, 자연을 보다가 어느새 역사와 마주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부안면의 꽃객프로젝트는 꽃을 좋아하는 이들이 SNS에서 자주 언급하는 이름이다. 핑크뮬리를 비롯한 여러 계절꽃이 어우러진 정원과 산책로가 ‘오늘의 한 장’을 남기려는 방문객들로 조용히 살아난다.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었다가도, 어느 순간엔 그저 꽃 사이를 천천히 걷고만 싶어지는 여유가 생긴다. 지역의 숨은 명소를 정원이라는 매개로 엮어내고, 그 과정을 통해 마을에 다시 사람을 불러들이려는 시도라서, 여행자는 풍경을 즐기면서도 자연스럽게 이 프로젝트의 의미를 체감하게 된다.
청보리밭으로 유명한 학원농장을 찾는 이들에게는 카페 넓은들이 편안한 쉼표가 된다.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구릉지는 사계절 내내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봄이면 청보리가 파도처럼 출렁이고, 여름에는 해바라기가 노란 얼굴을 들며 해를 따라 돈다. 가을에는 메밀꽃과 주황빛 황화코스모스가 뒤섞여 풍성한 색감을 만들고, 겨울에는 설원과 새싹보리가 어우러진 초록빛 융단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이 넓은 풍경 앞에서 고창 농산물을 활용한 음료나 디저트를 한 모금 맛보는 일은, 단순한 카페 방문을 넘어 ‘계절을 마시는 경험’에 가까워진다. 학원농장에서 생산된 보리차와 보리미숫가루 같은 특산품을 고르다 보면, 여행의 기억을 집으로 조금 가져가는 기분도 따라온다.
고창읍에 자리한 들꽃카페수목원은 한 번 더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폐교를 리모델링해 만든 이 수목원은 교실 대신 꽃과 식물, 운동장 대신 연못과 물레방아, 야자수 파라솔이 들어선 이색적인 풍경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5천여 평의 부지 곳곳에 산책 정원, 풍경 정원, 온실 정원이 나뉘어 있어 계절마다 다른 경로를 선택해 걸어볼 수 있다. 실내와 야외 테라스를 오가며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다 보면, 예전 학교 풍경 속에 지금의 다채로운 정원이 포개지는 느낌이 들어 묘한 향수를 자극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올 수 있는 실외 정원은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최근 고창을 찾는 중년 여행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는 곳은 쉼드림이다. 이름처럼 ‘쉼’을 선물하겠다는 이곳은, 특히 중년 여성의 마음에 맞춘 치유 여행을 제안하는 공간이다. 농촌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마당에 서면, 서둘러 어딘가를 돌아봐야 한다는 압박감 대신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가 먼저 찾아온다. 도착하자마자 준비되는 복분자 족욕은 하루의 피로를 천천히 풀어내는 작은 의식처럼 느껴진다. 저녁이 되면 돼지 바비큐 식사와 함께 장작불을 바라보는 불멍 시간, 군고구마를 굽는 체험이 이어지면서, 어릴 적 시골집 마당에 모여 앉았던 기억이 슬며시 겹쳐진다.
다음 날 아침에는 서둘러 움직일 필요 없이 여유로운 브런치로 하루를 연다. 계절에 따라 복분자나 블루베리 등 지역 농산물을 직접 수확하는 체험도 준비돼 있어, 도시 생활 속에서 잊고 지냈던 흙의 촉감과 열매의 무게를 손으로 다시 느끼게 된다. 참여자들은 “별다른 걸 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표현하며, 휴식의 기준이 화려한 코스가 아니라 ‘천천히 머무르는 시간’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변화는 숫자보다 풍경과 표정에서 먼저 읽힌다. 고창의 정원과 카페, 치유 공간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보다 바쁜 도시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사진을 찍고, 차를 마시고, 족욕을 즐기고, 수확을 돕는 행위들은 겉으로 보기엔 소소하지만, 그 안에서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만든다. “여행은 꼭 멀리 떠나야 한다”는 생각 대신 “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면 된다”는 기준이 자리 잡는 순간이다.
고창에서의 하루는 거창한 이벤트로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다시 이곳을 찾는 이유는 분명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들판과 바람 부는 정원, 폐교에 피어난 꽃과 장작불 앞에서의 고요한 밤이, 지친 마음에 천천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작고 사소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가을마다 이런 여행을 반복하는 사이 우리 삶의 속도와 방향은 조금씩 조용하게 바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