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으로 다시 걷다”…왼손 피아니스트, 재활이 바꾼 뇌졸중 치료 인식
뇌졸중 이후 재활치료의 역할이 달라지고 있다. 단순한 일상 기능 회복을 넘어 환자가 자신의 직업과 정체성을 되찾도록 돕는 방향으로 확장되는 흐름이다.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열린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 씨의 음악회는 고강도 재활과 뇌 신경가소성에 대한 최신 재활의학 패러다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된다. 의료진과 업계에서는 이번 무대를 뇌졸중 재활 전략이 ‘생존 중심’에서 ‘삶의 질·직업 복귀 중심’으로 이동하는 분기점 가운데 하나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은 16일 정오 병원 1층 로비에서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 씨를 초청해 재활 음악회를 열었다고 밝혔다. 뇌졸중으로 오른쪽 신체가 마비된 후 9년 전 같은 장소에서 첫 왼손 독주회를 열며 화제를 모았던 인물이 다시 같은 병원을 찾은 것이다. 행사는 이 씨의 회복 여정을 함께한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등 의료진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현재 치료 중인 환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 씨는 2012년 미국 신시내티 음악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좌뇌의 약 60퍼센트가 손상돼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되고 언어 기능 장애인 실어증까지 겹치면서 연주는 물론 기본적인 일상생활조차 어려운 상태가 됐다. 귀국 이후 서울성모병원에서 집중 재활치료를 이어갔고, 의료진과 은사의 권유로 재활 목표를 단순 보행 회복이 아닌 ‘무대 복귀’로 설정했다.
서울성모병원 신경과 구자성 교수가 담당한 신경학적 평가와 약물치료, 재활의학과·물리치료·작업치료 팀의 협업은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특히 오른손과 오른팔 기능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왼손의 미세 운동 기능을 극대화하는 집중 훈련이 이뤄졌다. 신경가소성은 손상된 뇌 부위의 기능을 남아있는 다른 부위가 대신하도록 조직과 회로가 재편되는 현상인데, 의료진은 반복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피아노 연습을 이를 촉진하는 고난도 기능 재활 도구로 활용했다.
이 같은 접근은 기존 뇌졸중 재활의 일반적인 목표와 차이가 있다. 과거에는 기초적인 보행, 식사, 의사소통 등 기본 일상생활동작 회복에 초점을 맞췄다면, 최근에는 직업 복귀와 전문 기능 회복을 겨냥한 개별 맞춤형 프로그램이 확산되고 있다. 서울성모병원은 이 씨에게 클래식 청취, 악보 읽기, 왼손 전용 스케일 훈련 등 음악 활동 자체를 재활 프로그램의 핵심 요소로 편성했다. 치료실에서 피아노 음원이 나올 때마다 이 씨가 즉석 왼손 연주 연습을 했다는 작업치료사의 설명은, 재활 환경 전반이 환자의 동기 유발을 목표로 설계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의 성과는 2016년 7월 같은 병원 로비에서 열린 첫 왼손 독주회에서 확인됐다. 당시 이 씨는 병원과 내원객, 뇌졸중 환자들을 앞에 두고 정식 무대에 올랐고, “감성이 오히려 더 풍부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주를 지켜본 미국 신시내티대학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이후 7회의 연주회를 마치면 박사학위를 수여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고, 이 씨는 이를 모두 충족해 2017년 정식 음악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의료계에서는 이 사례를 고난도 전문직 종사자의 직업 복귀를 목표로 한 성공적인 뇌졸중 재활 모델로 보고 있다.
무대 경험을 발판으로 이 씨의 활동 범위는 병원 영역을 넘어 확장됐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나의 왼손 독주회, 포스코재단 초청 의료진 감사음악회, 예술의전당 독주회 등 공연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 관객을 꾸준히 만나고 있다. 현재는 사회적 기업 툴뮤직 소속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툴뮤직장애인예술단, 지샘병원장애인예술단 단장을 맡고 있다. 뇌졸중과 반신 마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 나는 왼손 피아니스트입니다를 출간해, 재활 과정과 정신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공유하는 작업도 병행 중이다.
의료진은 이 사례가 뇌졸중 환자들의 심리적 상실감을 줄이고 재활 참여율을 높이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씨의 재활을 처음부터 함께한 한필우 물리치료사는 갑작스러운 발병 후 다수의 환자가 겪는 우울과 무력감을 언급하면서,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 다시 연주할 수 있는 힘으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지가은 작업치료사도 “음악에 깊이 집중하며 왼손 건반 연습을 이어가는 모습에서 저 역시 큰 긍정의 에너지를 받았다”며, 이번 공연이 다른 환자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작용하길 기대했다.
전문가들은 향후 국내 뇌졸중 재활 분야에서 개인의 직업과 관심사를 결합한 맞춤 프로그램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령화로 인해 뇌졸중 환자가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단기 입원과 표준화된 재활만으로는 장기적인 삶의 질과 사회 복귀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음악, 미술, 디지털 게임, 가상현실 등 다양한 도구와 IT 기반 원격 재활 플랫폼을 결합한 복합 프로그램의 수요가 커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훈 피아니스트는 이번 병원 공연 무대에서 “다시 이곳에서 연주회를 열게 돼 감회가 크다”며, “재활운동이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묵묵히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저처럼 다시 자신만의 무대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산업계와 의료계는 이 같은 사례가 뇌졸중 재활의 목표를 ‘장애 최소화’에서 ‘역량 회복과 사회 참여 확대’로 전환하는 촉매가 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