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리는 경주, 천년의 숨결 따라 걷다"…유적·카페·향기 공방 속 느린 여행
요즘은 선선한 가을비가 내리는 날에 경주를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조금 젖더라도, 어쩐지 도시가 내뿜는 습기와 천년의 시간에 스며들고 싶다는 마음에서다. 과거엔 박물관이나 유적지는 견학의 공간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고즈넉한 카페와 향기 가득한 체험 공방이 더해져 일상에 쉼표를 찍을 수 있는 곳이 됐다. 사소한 변화지만, 그 안엔 달라진 여행의 태도가 담겨 있다.
경주를 걷는 오늘, 기온은 어제보다 0.4도 낮아진 17.9도다. 약한 비가 이어지는 가운데, 습도 96%의 촉촉한 공기가 여행자의 머리에 얹힌다. SNS에는 빗물에 젖은 석탑이나 낙엽으로 물든 거리, 찻잔 속 김이 피어오르는 사진이 가득하다. “가을비 속 경주는 숨쉴 때마다 시간이 쌓이는 느낌이에요.”라는 후기처럼, 요즘 경주는 계절 자체가 배경음악이 된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그만큼 국립경주박물관, 동궁과 월지를 비롯한 주요 박물관과 야외 정원을 찾는 가족·연인 단위 방문이 꾸준히 늘고 있다. 트렌드 분석가들은 “지금의 여행자들은 과거의 사실을 배우기보다, 그 시간과 감각을 자신의 속도로 음미하는 데 의미를 둔다”고 표현한다. 박물관 야외 정원에 앉아 성덕대왕신종의 맑은 소리를 듣거나, 신라천년보고에서 유물 관리 과정을 바라보는 풍경은 지적 호기심에 감성을 더한다.
경주의 하동 일대에는 혼자서 혹은 누군가와 나눠 마시기 좋은 감성 카페가 늘고 있다. 블리스커피, 바실라 같은 곳에서는 매일 빵이 구워지고, 창 너머로 펼쳐지는 자연 풍경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단순히 커피 한 잔이 아니라, 시간의 속도를 세어보는 장소예요.”라는 방명록의 한 문장처럼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여행의 일부가 된다.
향기의 의미도 남다르다. 진현동의 애플캔들하우스에서는 120가지 향을 자유롭게 조합하는 조향 클래스가 인기다. 직접 만든 향수로 여행의 순간을 가지고 돌아간다는 후기가 이어진다. “향이라는 감각은 기억과 제일 가까워요. 비 내리던 경주의 공기, 스치는 흙냄새까지 제 손끝에 남았어요.”라는 여행자의 고백엔 ‘느낄 수 있는 것’에 가치가 옮겨진 지금의 여행을 짐작할 수 있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이젠 어디에 가도 그곳만의 냄새와 분위기를 꼭 느껴봐요.”, “비 오는 날엔 박물관이 최고” 같은 공감이 이어진다. 언제부턴가 여행의 채도는 높아졌지만, 속도는 느려졌다. 풍경, 소리, 향기처럼 사소한 감각이 기억의 중심이 되는 요즘, 경주는 모든 것이 머무는 법을 다시 알려준다.
경주는 고대와 현대, 감각과 지식이 어우러진 도시다. 오늘처럼 비 내리는 하루, 천년의 지혜와 현대적 감성이 교차하는 길을 걷는 일.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