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형 식품 포장·나노 방제”…한‑아세안, 식량안보 해법 모색
능동형 식품 포장과 나노입자 기반 병해 방제 기술이 한‑아세안 과학기술 협력의 상징적 사례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 연구기관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개발된 이들 기술은 식품 안전성과 농업 생산성을 동시에 겨냥하며, 기후 위기와 식량안보 불안을 겪는 아세안 지역에서 파급력이 클 것으로 평가된다. 업계와 정책 당국은 이번 수상이 한‑아세안 연구 인력 이동과 장기 공동연구 확대의 분기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4일부터 28일까지 제7회 한‑아세안 우수과학기술혁신상 시상식과 제5회 한‑아세안 과학기술혁신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연계 개최한다고 밝혔다. 양 행사는 한‑아세안 간 과학기술 협력과 인재 교류를 강화하기 위한 대표 플랫폼으로, 특히 신진 연구자의 공동연구 성과를 공식 인정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아세안 우수과학기술혁신상은 2019년 신설된 이후 올해로 7회째를 맞았다. 아세안 지역의 뛰어난 신진 연구자를 발굴하고 한국과의 지속 가능한 공동연구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둔다. 개척자상과 혁신자상 두 부문으로 나뉘며, 올해는 총 94명이 지원해 역대 최고 경쟁률을 기록했다. 과기정통부는 이 상을 한‑아세안 과학기술 네트워크의 핵심 인재 풀을 조기에 형성하는 정책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올해 개척자상에는 태국 치앙마이 대학교의 사린팁 타나카사라니 박사가 선정됐다. 그는 식품 안전성을 높이고 농식품 손실을 줄이는 능동형 식품 포장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능동형 포장은 단순 보호 기능에 머무르지 않고, 포장재가 내부 환경을 감지하거나 가스를 흡착·방출해 식품의 품질을 적극적으로 제어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포장 내부의 산소 농도를 조절해 미생물 증식을 억제하거나, 휘발성 물질을 흡착해 신선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사린팁 박사는 연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등 국내 대학과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재료 설계와 저장성 평가를 함께 진행해 왔다. 이런 연구는 냉장 인프라가 취약한 지역에서도 유통기한을 연장할 수 있어, 아세안 역내 식품 손실을 줄이고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기술로 주목된다.
개척자상은 한국 박사과정 재학 중이거나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5년 이내인 아세안 국적 연구자 가운데 한국과 공동연구 경험을 가진 과학기술자를 대상으로 한다. 과기정통부는 이 제도를 통해 한국 연구 환경을 경험한 인재가 본국으로 돌아가 자국 연구기관과 한국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실제로 사린팁 박사의 사례처럼 국내 대학과 장기 공동과제를 수행하는 구조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혁신자상 수상자인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테드릭 토마스 살림 류 교수는 식물 상태를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이식형 센서와 나노입자 전달 시스템을 활용한 병해 방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식형 센서는 식물 조직에 부착되거나 삽입돼 수분 스트레스, 영양 상태, 병원체 감염 반응 등을 자동 측정하는 장치로, 초박형 전자소자와 바이오 호환성 소재가 결합된 형태다. 여기에 농약 성분을 나노입자에 탑재해 식물 체내 특정 부위에 정밀 전달하는 기술을 결합하면, 기존 살포 방식 대비 약제 사용량을 줄이면서도 방제 효율을 높일 수 있다. 테드릭 교수는 성균관대학교와 협력해 기후 변화로 인한 병해 패턴 변동에 대응하는 정밀 방제 솔루션을 모색하고 있어, 기후·식량 문제를 동시에 겨냥하는 융합 연구자로 평가된다.
혁신자상은 박사학위 취득 후 경력 5년 미만이면서, 높은 연구 역량을 갖춘 유망 신진 과학기술자를 대상으로 한다. 개척자상이 한국 유학 및 공동연구 경험을 전제로 한 ‘연결형’ 인재 양성에 방점이 있다면, 혁신자상은 아세안 현지 연구 거점에서 혁신 성과를 창출하는 차세대 리더를 조명하는 구조다. 두 트랙 모두 식량안보, 기후 위기, 보건 등 아세안이 직면한 구조적 문제를 과학기술로 풀어가려는 정책 방향과 맞물려 있다.
과기정통부가 같은 기간 운영하는 한‑아세안 과학기술혁신 교육훈련 프로그램도 인재 모빌리티 관점에서 주목된다. 올해 프로그램의 주제는 한‑아세안 공동 성장 촉진을 위한 과학기술혁신 인재 모빌리티 강화 방안 모색이다. 아세안 11개국의 과학기술 정책 담당자와 전문가들이 참가해 정책 경험을 공유하고, 향후 공동 펀딩 구조와 교환 연구자 제도 등 인력 이동 촉진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참가자들은 올해 K Hero 우수 산학협력 사례로 선정된 노피온과 한양대 첨단반도체패키징센터를 방문해 소재·부품·장비와 시스템 반도체 분야의 협력 모델을 분석하게 된다. 또 LG사이언스파크와 판교 테크노벨리 등 국내 대표 혁신 클러스터를 둘러보며, 스타트업 지원, 기업 R&D 투자, 대학·연구소 연계 등 한국식 혁신 생태계의 작동 방식을 현장에서 체험한다. 이러한 일정은 바이오·식품·농업 분야 연구 인력에게도 반도체·ICT 인프라가 결합된 디지털 전환 전략을 이해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 보면 식품 포장과 농업 병해 관리 분야는 이미 나노기술과 센서, 인공지능이 결합하는 융합 연구 경쟁이 치열한 영역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스마트 포장에 내장된 센서 데이터와 유통망 데이터를 결합해 유통기한을 동적으로 조정하거나, 드론과 위성 영상, 토양 센서 정보를 통합해 병해 발생을 예측하는 시스템이 상용화 단계에 진입한 상태다. 아세안은 기후 리스크가 크지만 농업 데이터 인프라는 아직 초기 단계라, 한국과의 협력을 통해 실증 연구를 빠르게 축적하는 전략이 유효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아세안 협력이 본격화되면서 데이터 공유, 나노 소재 안전성, 농식품 규제 조화 등의 과제도 부상하고 있다. 능동형 포장에서 사용되는 기능성 화학물질과 나노입자 기반 방제 기술은 각국 식품·농약 규정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농업용 나노소재에 대한 독성 평가와 환경 영향 평가 기준도 국가마다 상이해, 공동 가이드라인 수립 논의가 필요해질 수 있다. 동시에 식물 이식형 센서가 수집하는 데이터의 소유권과 활용 범위를 둘러싼 개인정보·농가 권리 논쟁 가능성도 제기된다.
구혁채 과기정통부 제1차관은 시상식에서 한국과 아세안이 과학기술 혁신의 중심 파트너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신진 연구자 간 활발한 교류가 공동 번영을 위한 가장 강력한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산업계와 연구계는 이번 수상이 식품·농업·바이오 융합 분야에서 실질적인 공동 연구소 설립과 장기 프로젝트로 이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런 협력이 아세안 역내 식량안보와 지속 가능한 농업 전환의 실질적 계기가 될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