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안보가 국가안보"…미국, 팍스 실리카로 중국 견제 AI 경제동맹 구상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인공지능 산업을 무대로 다시 격돌했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 등 기술 동맹국을 규합해 AI 공급망을 중심으로 한 경제안보 연대를 띄우면서, 동맹국들의 대중국 전략 선택지가 시험대에 올랐다.
미국 국무부는 11일 현지시간 미국, 일본, 한국, 싱가포르, 네덜란드, 영국, 이스라엘, 아랍에미리트, 호주 등 8개국이 참여하는 첫 팍스 실리카 서밋을 12일 개최한다고 밝혔다. 국무부는 팍스 실리카를 핵심광물, 에너지, 첨단제조, 반도체, AI 기반시설과 물류를 포괄하는 전략 구상이라고 소개하면서, 미국 주도로 안전하고 번영하며 혁신적인 실리콘 공급망을 구축하겠다고 설명했다.

팍스 실리카라는 명칭은 평화를 뜻하는 라틴어 팍스와 반도체 소재 실리카를 결합한 것이다. 국무부는 명칭 선택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국제정치권에서는 과거 로마 제국의 팍스 로마나와 미국이 주도하던 팍스 아메리카에 빗댄 상징적 시도로 해석하는 기류가 형성돼 있다. 미국이 AI와 반도체를 매개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다.
국무부는 보도자료에서 팍스 실리카를 통해 파트너 국가들에 AI가 주도하는 번영의 시대를 보증하는 견고한 경제질서를 구축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이 세계 기술 공급망 전체에 걸쳐 안전하고 회복력 있으며 혁신이 주도하는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원칙을 중심으로 국가 간 연합을 조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겉으로는 공급망 안정과 기술 생태계 강화를 내세웠지만, 외교가에선 중국 견제 구상이 분명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무부는 문서에서 중국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지만, 참가국들이 민감한 기술과 핵심 기반시설을 우려 국가의 부당한 접근이나 통제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공동 의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첨단기술 분야에서 우려 국가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통상 중국을 가리켜 왔다는 점에서, 팍스 실리카를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연장선에 두려는 의도가 읽힌다는 관측이 뒤따랐다.
참가국 면면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팍스 실리카에 참여한 국가는 세계 AI 공급망에 동력을 제공하는 주요 기업과 투자자가 집중된 곳이자 미국의 전통 우방이다. 국무부는 이번 서밋을 출발점으로 삼아 향후 참가국을 더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국무부는 또 참가국들이 경제안보가 국가안보이며 국가안보가 경제안보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합의에 기초해 협력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바탕으로 공급망 안보 강화, 강압적인 취약성 대응, 신뢰하는 기술 생태계 도입 등에서 공동 대응을 모색하겠다는 구상이다. 경제정책과 안보전략을 사실상 하나의 축으로 묶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다만 동맹국 간 속도 조절 문제는 불가피한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미국이 팍스 실리카를 중국 견제의 제도적 틀로 삼으려 할 경우, 첨단 분야 수출통제와 대중 투자 규제 등 공격적인 경제안보 정책이 연이어 테이블에 오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AI와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 협력 강화에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AI 공급망 협력을 넘어 중국을 직접 겨냥한 수출통제나 투자 제한에 동참해 달라는 요구가 현실화될 경우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 외교·산업 정책 라인에서 나온다. 한국 정부 안팎에선 팍스 실리카 참여가 향후 대중 관계와 산업 구조에 미칠 파장을 두고 신중론이 제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미국과 보조를 맞추는 움직임을 보다 선제적으로 보였다. 이날 워싱턴DC 미국평화연구소에서 열린 행사에서 미국과 일본은 양국 협력 의지를 확인하는 공동 문서에 서명했다. 미국 측에서는 제이콥 헬버그 국무부 경제 담당 차관이, 일본 측에서는 야마다 시게오 주미일본대사가 대표로 서명했다.
헬버그 차관은 서명식에서 우리나라와 우리가 신뢰하고 의존할 수 있는 국가들이 AI 기술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 임무에 있어서 일본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평가하며 미일 기술 동맹의 중요성을 부각했다.
크리스토퍼 랜도 국무부 부장관도 팍스 실리카의 방향성을 설명하며 중국 견제 논란을 의식한 듯 한 발 더 나아간 메시지를 던졌다. 랜도 부장관은 우리의 목표는 나머지 세상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폐쇄하겠다는 게 아니라 우려 국가나 기업의 부당한 영향력이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공급망과 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전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출통제와 투자 검증 같은 경제안보 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랜도 부장관은 이런 정책이 관료주의적 행위가 아니라 미래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이라고 강조하며, 혁신과 공정한 경쟁을 저해할 위험이 있는 경제적 강압과 숨 막히는 글로벌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미래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안보 조치 강화를 정당화하면서도 규범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발언으로 해석된다.
팍스 실리카는 AI 공급망을 전면에 내세운 점에서 차별화되지만, 미국이 첨단기술을 매개로 한국과 일본 등 신뢰하는 국가들을 경제 동맹으로 묶으려는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국무부는 경제번영네트워크 구상을 발표하며 한국 등 동맹국에 참여를 요청한 바 있다. 당시에도 중국 견제 구도가 뚜렷해 동맹국 내에서 참여 범위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다.
외교가에선 팍스 실리카가 향후 인공지능, 반도체, 데이터 인프라 등 미래 산업 전반을 규율하는 새로운 블록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관측과 함께, 동맹 내부 균열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각국이 중국과의 경제 의존도를 달리하는 만큼, 수출통제와 투자 규제 수위에서 이견이 표면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국회와 정치권에서는 향후 미국의 구체적 요구가 가시화될 경우 대중 의존도가 높은 산업계 의견을 반영한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향후 서밋 논의 과정과 동맹국 간 조율 상황을 지켜보며, 경제안보와 수출시장 다변화, 산업 경쟁력 유지를 모두 고려한 참여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