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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학살 책임자 미화 안 돼”…제주도, 박진경 국가유공자 등록에 강력 유감

최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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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의 국가유공자 결정과 제주4·3의 역사적 평가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제주4·3 당시 강경 진압을 지휘해 양민 학살 책임자로 지목돼 온 고 박진경 대령이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주특별자치도와 지역 시민사회, 야권이 일제히 반발에 나섰다.  

 

제주도는 10일 입장을 내고 “박진경 대령 국가유공자 등록 관련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며 “4·3의 진실과 희생자 명예가 훼손되지 않도록 사실에 기반한 역사 정립 작업을 이어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도는 국가보훈부의 결정 과정에 4·3의 역사적 맥락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제주도는 “박진경 대령은 4·3 당시 무차별적인 주민 연행으로 피해를 가중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4·3의 역사적 맥락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결정이 도민사회에 혼란과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가보훈부가 오래전에 무공훈장을 받았다는 이유로 박 대령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게 된 현재의 제도가 결과적으로 4·3 희생자와 유족, 도민의 아픔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주도는 논란 확산에 대응해 오는 15일 박진경 대령 추도비 옆에 제주도,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희생자유족회 공동 명의로 ‘바로 세운 진실’이라는 제목의 안내판을 설치할 계획이다. 도에 따르면 안내판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등을 토대로, 4·3실무위원회와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4·3평화재단이 추천한 자문위원들과 함께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구성했다.  

 

안내판에는 1945년 8월 해방 이후 제주 사회 상황과 1947년 3월 관덕정 경찰 발포 사건, 1948년 5월 제주에 부임한 박진경 대령의 약 40여 일간 행적, 안내판 설치 취지 등이 담길 예정이다. 제주도는 해당 안내판을 통해 국가 차원의 공식 진상조사 결과와 학술 연구 성과를 근거로 박진경의 역할과 책임을 설명하겠다는 입장이다.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4·3의 진실은 특정한 시각이나 정치적 해석이 아니라 국가가 확정한 공식 보고서와 수많은 연구의 축적 위에서 확인돼왔다”며 “도는 사실에 근거한 설명을 통해 4·3의 역사적 진실을 성실히 알려 나갈 것이며, 희생자와 유족 명예가 훼손되지 않도록 진실을 바로 세우는 일에 책임있게 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중앙정부 결정과 별개로 지방정부 차원에서 역사 인식의 기준선을 분명히 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셈이다.  

 

지역사회와 정치권의 반발도 거세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국가보훈부가 그를 무공수훈자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유공자로 인정한 것은 수많은 희생자의 억울한 죽음을 부정하는 행위”라며 국가유공자 등록 취소를 촉구했다. 위원회는 “가해 책임이 있는 인물을 국가유공자로 추앙하는 것은 희생자와 유족 명예를 다시 한번 짓밟는 행위”라며 “지금이라도 국가유공자 인정을 취소하고, 역사의 단죄 대상이 국가유공자가 다시는 될 수 없도록 관련 제규정 정비에도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에서도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 문대림 의원은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국가유공자 제도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희생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운영돼서는 안 될 것”이라며, 잘못된 유공자 지정이 수정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밝혔다. 제도적 기준과 역사적 판단 사이의 충돌을 국회 차원 논의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노동계와 진보 진영도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민주노총 제주본부는 성명에서 “국가폭력 내란을 딛고 들어선 이재명 정부가 이래선 안된다. 국가폭력 역사에 대한 철저한 청산과 단죄 없이 내란의 완전한 종식도 없다”며 국가보훈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국가폭력 행위에 동조하고 정의로운 역사에 반하는 국가보훈부 장관을 즉시 해임하고 4·3 유족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야권 지역조직들도 일제히 가세했다. 더불어민주당 제주도당은 “강한 유감과 분노를 표한다”며 “국가폭력 선두에 섰던 자에게 ‘애국정신의 귀감’이라는 표현과 함께 ‘항구적으로 기리겠다’는 국가유공자 증서가 수여된 것은 4·3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해 힘써왔던 그간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국혁신당 제주도당은 “국가보훈처는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자격을 즉각 취소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최소한의 정의와 양심을 회복하기 위한 의무”라고 강조했다. 진보당 제주도당도 “진정한 해원은 4·3의 올바른 진상규명과 함께 다시는 4·3 왜곡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그 해원의 길에 재를 뿌렸다”고 비판하며, 국가유공자 증서 철회를 촉구했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서울보훈지청은 지난해 10월 박진경 대령 유족이 제출한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무공수훈을 근거로 승인했다. 이어 지난달 4일 이재명 대통령과 권오을 보훈부 장관 직인이 찍힌 국가유공자증을 유족에게 전달했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5월 당시 제주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으로 부임해 강경 진압 작전을 지휘한 인물로, 여러 4·3단체는 그를 양민 학살 책임자로 규정해 왔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무공훈장 수훈 이력만을 기준으로 한 기계적 심사가 4·3과 같은 국가폭력 사건의 역사적 책임 문제와 충돌했다고 보는 분석도 나온다. 국가보훈 제도가 군 경력과 공적 중심으로 설계돼 온 만큼, 과거사 정리와 인권 기준을 반영한 재정비가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제주도와 4·3단체, 야권은 국가보훈부를 상대로 제도 개선과 재심을 촉구하며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향후 국회 차원의 관련 법령·제규정 정비 논의와 더불어, 국가보훈부가 박진경 대령 국가유공자 인정 여부를 재검토할지 여부가 정치권의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최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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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박진경#국가보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