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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기초연구 재설계”…정부, 10년 한우물파기 지원 확대

최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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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국내 기초연구 생태계를 장기·안정 투자 체계로 전환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개인연구에 대해 최대 11년에 이르는 장기지원 사다리를 깔고, 포닥과 신규 교원 등 청년 연구자 1만명을 집중 육성한다. 동시에 인공지능을 연구도구로 전면 도입하기 위해 기초연구 전용 AI 센터 40곳을 구축, 기초과학과 AI 융합을 가속한다는 구상이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이를 R&D 예산 구조조정 이후 흔들린 국내 기초연구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분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나온다.

 

정부는 18일 제2회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이런 내용의 기초연구 생태계 육성 방안을 관계부처 합동으로 심의·발표했다. 목표는 2030년까지 세계 5대 기초연구 강국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투자 시스템과 연구자, 연구기관, 연구 기반을 아우르는 4대 전략과 12개 과제를 제시했다.

우리나라 기초연구는 양적 투자 확대에도 불구하고 상위 1퍼센트 고피인도 연구자 수, 네이처 인덱스 기준 세계 최상위 연구기관 순위 등 질적 지표에서 선진국과 격차가 크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최근 정부 R&D 예산 조정 과정에서는 학문 다양성과 연구 안정성이 동시에 흔들렸다는 현장의 비판도 거셌다. 정부가 장기 개인연구와 청년층 집중 육성에 방점을 찍은 배경이다.

 

첫 번째 축은 안정적·지속 가능한 기초연구 투자 시스템이다. 정부는 연구자가 가장 선호하는 기본연구 사업을 복원하고, 생애 첫 연구 수행자와 경력 단절 연구자, 지방 소재 연구자 등 연구 기반이 취약한 집단을 우대해 기초연구 저변을 넓힌다. 그동안 1년에서 3년에 그쳤던 개인연구 기간은 3년에서 5년으로 늘리고, 동일 주제에 대한 심화 후속연구를 최대 두 차례까지 연계해 지원한다. 연구자는 최초 5년에 더해 3년짜리 후속연구를 두 번 수행할 경우 최대 11년 동안 같은 연구 주제를 안정적으로 파고들 수 있다.

 

정부는 기초연구 사업을 예산 총액이 아닌 수혜율 중심으로 관리 체계를 바꾼다. 2030년까지 전체 교원 수혜율 30퍼센트, 전임 교원 50퍼센트, 신진 교원 70퍼센트 확보를 목표로 제시했으며, 이에 맞춰 기초연구 투자 비중도 단계적으로 확대한다. 정부 연구개발 투자에서 일정 비율 이상을 기초연구에 배정하도록 노력 의무를 담는 방향으로 기초연구진흥법 개정도 추진해 제도적 장치를 강화할 계획이다.

 

청년과 리더급 연구자에 대한 맞춤 지원도 촘촘해진다. 정부는 박사후연구원과 초기 임용 교원 등 청년 연구자를 향후 5년간 1만명 규모로 지원해 연구 경력 초입의 공백을 줄이겠다는 방침이다. 연구 성과와 경력을 쌓아갈 때 단계 간 단절 없이 이어지는 성장 사다리를 설계해 우수 인력이 연구직을 지속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취지다. 상위권 연구자를 위한 탑 티어 리더연구 프로그램도 신설해 세계 최고 수준 연구자로 도약할 수 있도록 장기·대형과제를 제공하고, 해외 유수 연구기관과의 파트너십 구축을 지원한다.

 

정책은 학문 구조 변화 속도도 고려한다. 정부는 물리학·화학·생명과학 등 기존 분과의 특성과 자율성을 반영한 분야별 지원체계로 점진적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기존 분류에 없던 융합·신흥 분야 개척연구에 대한 지원도 늘리기로 했다. 양자과학, 합성생물학, AI 기반 계산과학처럼 경계가 모호한 영역에서 세계 최초 성과를 노릴 수 있도록 자율성이 큰 과제 구조를 설계하겠다는 구상이다.

 

두 번째 전략은 인재 요람인 대학 연구생태계의 체질 개선이다. 핵심 수단으로 성과 기반 블록펀딩 도입이 검토된다. 블록펀딩은 개별 과제 단위가 아닌 대학 단위로 일정 규모의 연구비를 묶어 지원하고, 대학이 이를 전임연구원과 연구지원인력 확충, 첨단 장비 도입 등 연구 인프라에 자율적으로 배분하는 방식이다. 성과와 연동된 블록펀딩을 통해 대학이 중장기 연구 전략을 설계하고 인력 구조를 정비하도록 유도하겠다는 의도다. 세부 지원 대상과 규모, 평가 기준 등은 현장 의견 수렴을 거쳐 구체화된다.

 

지역 균형을 위한 장치도 포함됐다. 정부는 국가연구소 사업 내에 지역 트랙을 신설한 NRL2.0 구상을 내놓고, 지역혁신 선도연구센터 지원을 강화해 지방 대학의 기초연구 저변을 넓힐 계획이다. 지방 소멸 위기에 대응해 지역 거점 대학이 지역 산업과 연계한 기초연구 허브로 성장하도록 뒷받침하겠다는 의미다.

 

연구기관 측면에서는 기초과학연구원 IBS 역할이 확대된다. 정부는 IBS를 첨단 기초과학 분야의 중추 기관으로 키우고, 글로벌 우수 인재를 적극 유치할 수 있도록 해외 지사 설립과 해외 연구팀 패키지 유입을 추진한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연구팀을 통째로 국내로 들여오는 방식으로 세계급 연구 역량을 단기간에 확보하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민간 역할을 키우기 위한 산·학·연·정 협의체도 꾸려진다. 정부는 이 협의체를 통해 전략적 기초연구를 지원할 민·관 매칭펀드 조성과 기업계약연구소 설립 등 다양한 협력 모델을 논의한다. 반도체, 바이오, AI 등 대기업이 필요로 하는 장기 기초연구를 정부-기업 공동 출자로 뒷받침해, 기업의 단기 이익 중심 R&D 구조를 일부 보완하겠다는 구상이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AI 기반 연구 지원 인프라다. 정부는 연구자가 인공지능을 활용해 논문과 데이터를 분석하고, 실험 설계를 최적화하는 등 연구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2030년까지 총 40개의 기초연구AI 센터를 지정·운영한다.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등 도메인별로 특화된 AI 모델과 데이터셋을 구축해 연구자에게 제공하고, 대학 내 AI 활용 환경을 지원하기 위한 전용 컴퓨팅 인프라도 함께 깔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난해한 이론 물리 계산이나 신약 후보 탐색, 재료 구조 설계 등 기존 방식으로는 시간이 많이 걸리던 문제를 AI 기반 시뮬레이션과 예측으로 뒷받침하는 연구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기초연구와 AI 융합에 특화된 연구인력 2000명을 2030년까지 양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AI 활용 능력을 갖춘 기초과학자를 체계적으로 늘려, 국내 AI·바이오·반도체 산업의 기반 기술 축적을 뒷받침하겠다는 계산이다.

 

연구 행정 절차도 손질된다. 정부는 대학 내 연구지원인력의 역할을 강화하고, 평가 시스템을 단순화해 연구자가 행정업무에 쓰는 시간을 줄인다는 방침이다. 세부 과제 진행 단계마다 반복되던 단계평가는 폐지 방향으로 정리하고, 선정평가도 최소화해 심사 부담을 줄인다. 더 나아가 평가 과정 전반에 AI 기술을 점진적으로 도입해 심사위원의 자료 검토를 보조하고, 서류 형식 오류 점검 등 반복 업무를 자동화한다는 계획이다. 기계적 스코어링이 아닌, 평가자 판단을 돕는 도구로 AI를 활용해 평가의 전문성과 신뢰성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이번 방안은 국내 기초연구를 산업화 성과 지표 중심의 평가 구조에서 부분적으로 분리해, 장기·고위험 연구의 공간을 복원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실제 예산 배분과 법 개정, 대학·연구기관의 수용 속도에 따라 체감 효과가 달라질 수 있어, 후속 이행 과정에서의 정책 일관성과 정치적 변수 관리가 관건으로 지목된다. 특히 블록펀딩과 장기 개인연구 확대가 기존 단기 과제 중심 구조와 어떻게 조정될지, 또 AI 인프라 투자와 연구 현장 교육이 적절히 결합할 수 있을지가 핵심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원리를 탐구하고 지식의 토대를 쌓는 기초연구는 우리 과학기술 발전의 근간이자 미래 혁신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하며, 이번 방안을 통해 연구자가 걱정 없이 장기·안정적으로 창의적 연구를 수행하고 그 과정에서 세계적 성과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생태계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산업계와 학계는 향후 예산과 제도 설계가 계획대로 안착해, 기초연구와 AI 융합이 실제 기술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최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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