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가 인하·경기 둔화 직면"…제약바이오, 역량 결집이 돌파구 될까
약가 인하 압력과 글로벌 경기 둔화가 맞물리며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의 경영 환경이 급격히 매서워지고 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약가제도 개편이 연구개발 투자 여력과 필수의약품 공급 안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 산업 생태계 전반의 구조 조정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업계는 내년을 제약바이오 산업의 지속 가능성과 국가 보건안보를 동시에 시험하는 분기점으로 보고, 혁신 역량을 한데 모으는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는 데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은 29일 발표한 2026년 신년사에서 내년 병오년을 약가 인하와 경기 둔화 등 복합 위기가 겹친 시기로 규정하며, 산업계의 공동 대응을 촉구했다. 노 회장은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이 국가 전략산업이자 미래 성장축으로 부상했지만, 대내외 환경은 녹록지 않다고 진단했다. 특히 최근 정부가 내놓은 약가제도 개편안이 시장 전반의 수익 구조를 흔들 수 있는 변수로 부상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 약가제도 개편 방향이 제약사의 수익성과 현금 흐름에 직접 연결된다고 짚었다. 약가가 하향 조정되면 매출 단가가 떨어져 단기적으로는 영업이익률이, 중장기적으로는 연구개발 투자 재원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 회장은 특히 채산성이 낮은 필수의약품의 경우 수익성이 더 낮아져 공급 포기나 생산 중단이 현실화될 가능성을 언급하며, 이 경우 환자 치료 공백과 대체 약품 수급 불안으로 이어져 보건안보가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약가 정책이 단순한 재정 절감 수단을 넘어, 필수의약품 공급 안정성이라는 공공재 성격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발언으로 해석된다.
글로벌 거시 환경도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부담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혔다. 노 회장은 세계 경기 둔화로 인한 의약품 수요 성장세 둔화, 국가별 보건 재정 압박에 따른 약가 통제 강화, 지정학적 갈등에 따른 공급망 재편 이슈를 동시에 거론했다. 원료의약품과 바이오 생산용 소재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하는 국내 산업 구조상, 특정 국가 봉쇄나 물류 차질이 발생하면 원가와 리드타임이 급격히 변동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여기에 고환율과 관세 부담이 더해지면서 수출 경쟁력과 해외 생산 거점 운영 비용 모두 압박을 받는 형국이라는 평가다.
제약바이오 산업은 지금까지 다국적사 의존도가 높던 신약 공급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산 신약 개발과 바이오시밀러, 위탁생산과 같은 영역에서 성장해 왔다. 노 회장은 이 과정에서 국내 기업들이 축적한 연구개발 역량과 글로벌 임상, 생산 품질관리 경험이 국가 차원의 전략 자산이 됐다고 강조했다. 특히 혁신 신약, 세포 유전자 치료제, 항체의약품, 백신 등 고부가가치 영역에서 기술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이 늘어나면서, 산업이 국가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약가와 경기, 공급망, 환율이라는 네 가지 리스크가 동시에 불거지는 상황에서 이러한 성장 궤적을 유지하려면 산업 생태계 전체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약가 인하로 인한 수익성 악화를 상쇄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파이프라인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글로벌 임상과 기술이전, CDMO 사업 등 해외 수익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울러 원료와 핵심 장비의 국산화, 다변화된 조달망 구축 등 공급망 리스크 관리가 중장기 생존 전략의 필수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규제와 정책 환경 측면에서 보면, 약가제도 개편은 건강보험 재정 안정과 제약산업 육성이라는 두 목표 사이의 균형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려면 약가를 합리적으로 관리해야 하지만, 지나친 인하 압력은 혁신 신약 개발 투자와 필수의약품 생산 유인을 떨어뜨릴 수 있다. 업계에서는 혁신 성과에 대한 보상과 필수의약품 공급 안정에 대한 인센티브를 분리 설계하고, 장기투자 유인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제도 정교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노 회장은 이런 환경 속에서 제약바이오 산업이 지속 가능한 혁신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쌓아온 연구개발 역량, 글로벌 사업 경험, 생산 인프라를 토대로 산업 구조를 한 단계 고도화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단기 실적에 쏠리기보다 중장기 파이프라인과 기술 플랫폼에 대한 투자를 이어가고, 오픈 이노베이션과 산학연 협력을 통해 혁신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메시지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비전 2030으로 제시한 K-Pharma 전략을 통해, 제약바이오를 대한민국의 건강한 미래를 책임지는 핵심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재확인했다. 협회는 290여 개 회원사와 함께 약가, 규제, 공급망, 인력 양성 등 현안에 대한 정책 대응과 산업 생태계 조성을 병행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업계에서는 내년 정책 방향과 글로벌 경기 흐름에 따라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투자 전략과 사업 구조 재편 속도가 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계는 이번 위기 국면에서 제약바이오가 실제로 국가 전략산업으로 기능할 수 있을지, 제도와 시장이 어떻게 조응할지에 주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