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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AI·원격의료 급변…의협, 무분별 도입은 제2 의료사태 경고

이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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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인공지능과 비대면 진료 기술이 헬스케어 현장을 빠르게 바꾸는 가운데, 의료계는 제도와 규범이 따라가지 못할 경우 또 한 번의 대규모 의료혼란이 재발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의사 면허체계와 진료권, 처방권을 전제로 설계된 기존 의료시스템에 AI 진단보조, 원격의료 플랫폼,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이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정부의 규제 개편 방향에 따라 의료산업 전반의 이해관계 충돌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분위기다. 업계에서는 올해를 두고 의료AI와 디지털 헬스케어 제도화를 둘러싼 갈등이 가시화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대한의사협회는 31일 공개한 신년사에서 최근 정부와 국회의 보건의료 정책 방향이 첨단기술 도입을 명분으로 의료전문직의 면허체계를 흔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택우 의협 회장은 검체검사 위수탁 제도 개편, 관리급여 항목 지정 방식, 의약품 공급 불안, 한의사의 엑스레이 사용 추진, 의대 신설 논의 등을 거론하며 의료계 근간을 위협하는 정책이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인공지능과 비대면 진료 기술의 급속한 확산이, 면허권을 전제로 구축돼 온 기존 법제와 충돌하면서 의료현장 불안을 키우고 있다고 평가했다.

의협은 이미 미래의료특별위원회를 가동해 의료AI와 비대면 진료 확산에 대응하는 자체 청사진을 마련 중이다. 김 회장은 인공지능과 비대면 기술이 의료시스템 전반의 구조를 바꾸는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며, 협회가 AI 시대 의료안전 기준과 전문성 유지체계를 확립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알고리즘 기반 진단보조 소프트웨어와 원격 모니터링, 디지털 치료제 등 소프트웨어 의료기기와 플랫폼 서비스가 실제 임상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책임소재와 안전성 검증 기준을 명확히 하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의료계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AI 진단보조와 원격의료 플랫폼이 기존 진료권 구조를 어떻게 재편할지 여부다. 현재도 영상 판독, 병리 분석, 심전도 분석 등 여러 영역에서 AI 기반 소프트웨어가 의료기기 인허가를 받아 활용되고 있지만, 최종 판단 책임은 의사가 지는 구조다. 의협은 이런 책임 구조를 유지하지 않은 채 플랫폼 사업자나 타 직역에 판단 권한이 넘어갈 경우, 의료법과 면허체계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개악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김 회장은 의료법이 규정하는 면허 범위를 위배하고 헌법상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제도 개편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정부와 국회는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강화, 의료 인력 확충을 내세우며 정책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 지방 의대 신설, 공공병원 중심의 필수의료 인력 배치와 함께, 지역 격차 해소 수단으로 비대면 진료와 원격 모니터링을 확대하는 방안도 병행 논의되는 분위기다. 의료 AI 솔루션을 지역 병원과 의원급 의료기관으로 빠르게 보급해 대도시와 지방의 진료 품질 격차를 줄이겠다는 계획도 거론된다. 그러나 의협은 저수가, 과도한 업무 강도, 잦은 형사·민사 책임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력만 억지로 늘리거나 기술만 덧씌우면, 지역의료 붕괴를 막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의료AI 경쟁이 이미 본격화됐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영상의학, 심장질환, 당뇨성 망막병증 등 특정 영역에서 AI가 의사의 진단을 보조하거나 일부 선별검사를 대체하는 수준까지 진입했다. 원격 모니터링 기기, 디지털 치료제, 만성질환 관리 앱도 보험 수가 체계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국내에서도 다수의 스타트업과 병원이 인공지능 판독, 예후 예측, 병상 운영 최적화 솔루션을 내놓으며 시장을 넓혀가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협은 새 기술을 배척하기보다는, 의료전문가가 중심이 되는 규제 설계와 역할 재정립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규제 측면에서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인허가 기준과 보건복지부의 비대면 진료 제도화 방향,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의료데이터 활용 가이드라인이 핵심 변수로 꼽힌다. 의료AI와 원격진료는 대규모 임상데이터 학습과 실시간 데이터 전송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데이터 보호와 활용 간 균형을 둘러싼 논쟁도 불가피하다. 의협은 보건의료체계를 무너뜨리는 악법과 악제도에 대응하겠다며, 전문가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규제 개편에는 조직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의협은 동시에 초고령사회에 맞는 통합돌봄 모델에서 의사를 돌봄 체계의 중심으로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공지능과 비대면 플랫폼이 생활기반 돌봄과 연계되더라도, 고위험군 선별, 치료 방향 결정, 다학제 조율은 의료전문가의 판단에 기대야 한다는 논리다. 김 회장은 의료인이 오래 머물 수 있는 지역 인프라와 근무환경을 갖추는 것이 필수의료의 전제라며, 기술로 인력 공백을 메우려는 접근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의사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잘못된 정책이 국민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라며, 경고해야 할 때 경고하고 막아야 할 때 막는 것이 의료인의 의무와 양심이라고 강조했다. 정부와 국회에는 전문가 의견을 경청하고 현장을 정확히 이해해야 건강한 복지사회를 설계할 수 있다며, 독단적인 정책 강행으로 의료계와 갈등을 키우지 말라고 경고했다. 의료산업계와 의료계 모두에서, 앞으로 의료AI와 비대면 기술이 실제 현장에 안착하는 과정이 한국 보건의료 체계의 향배를 가를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산업계는 새로운 기술이 시장에 안착하는 속도보다, 제도와 직역 구조의 조정이 더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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