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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강경진압 주도자 국가유공자 등록 논란”...보훈부, 제주도민에 사과

송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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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식의 균열과 국가 보훈 체계가 정면으로 맞붙었다. 제주 4·3사건 당시 강경 진압 작전을 지휘한 고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을 둘러싸고 제주 지역사회와 국가보훈부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양새다.  

 

10일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서울보훈지청은 지난 10월 박진경 대령 유족이 제출한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승인했다. 박 대령은 이미 전몰군경으로 인정돼 현충원에 안장돼 있었으며, 이번에는 을지무공훈장 수훈 이력을 근거로 무공수훈자 자격의 국가유공자로 다시 등록됐다.  

국가보훈부는 지난달 4일 박 대령 유족에게 국가유공자증을 전달했다. 증서에는 이재명 대통령과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의 직인이 찍혔다. 증서 문구에는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를 애국정신의 귀감으로 삼아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해 이 증서를 드린다”고 적혀 있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5월 당시 제주에 주둔하던 국군 제9연대장으로 부임해 제주 4·3사건 과정에서 도민을 대상으로 한 강경 진압 작전을 지휘한 인물로 알려져 왔다. 4·3 관련 단체들은 그동안 박 대령을 양민 학살 책임자로 지목하며 비판해 왔다. 박 대령은 부임 한 달여 뒤인 1948년 6월 18일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친 뒤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 부하들에게 암살됐다. 정부는 1950년 12월 그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부 관계자는 “박 대령은 이미 전몰군경으로서 원호대상자, 지금의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상태였다”며 “이번에 을지무공훈장 수훈을 근거로 무공수훈자로 다시 국가유공자에 등록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몰군경으로서의 기존 예우와 별개로, 무공훈장 서훈 이력이 재차 법적 근거로 작동했다는 취지다.  

 

그러나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 사실이 알려지자 제주 지역사회는 즉각 반발했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수많은 희생자의 억울한 죽음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규정하며 “국가유공자 등록을 취소하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단체 측은 4·3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 회복을 위한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 과정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주장했다.  

 

제주특별자치도도 별도 입장을 내고 깊은 유감을 표했다. 제주도는 “4·3 희생자와 유족, 도민의 아픔을 가중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4·3 특별법 제정과 국가 차원의 공식 사과 이후 이어져온 화해와 치유 흐름을 해치는 조치라고 지적했다.  

 

논란이 확산하자 국가보훈부는 이날 입장문을 발표하고 제주도민과 유족에게 고개를 숙였다. 국가보훈부는 “제주 4·3과 관련한 논란이 있는 사안에 대해 신중한 검토가 이뤄지지 못한 점에 대해 희생자와 유가족 그리고 제주도민께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에 대한 보훈 결정 과정에서 사회적 논란을 충분히 감안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다만 국가보훈부는 현행 제도상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을 곧바로 취소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보훈부는 박 대령의 을지무공훈장 서훈이 유지되는 한 이를 근거로 한 국가유공자 등록 자체를 뒤집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해석을 내놨다. 무공훈장 취소는 별도의 법적 절차와 판단이 필요한 사안으로, 단순 행정 결정만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국가보훈부는 “앞으로 유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거쳐 조속히 대응방안을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향후 보훈 심사 과정에서 역사적 논쟁이 있는 인물에 대해 어떤 기준을 적용할지, 또 4·3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작업과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지에 대한 제도 개선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도 관련 논의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국회는 향후 보훈 관련 법령과 4·3 특별법 운용 과정에서 이 사안을 주요 쟁점으로 다룰 수 있으며, 정부는 관계 부처 협의를 통해 보훈 제도와 과거사 정책 간 충돌을 줄이기 위한 방안을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송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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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국가보훈부#제주4·3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