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바이오

성분명 처방 두고 여론 재는 의협…제약산업 위기론 부각

최영민 기자
입력

성분명 처방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둘러싸고 의료계와 정부·여당 간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대한의사협회가 국민 인식조사 결과를 공개하며 여론전에 나선다. 의약품 수급불안 해소를 위한 제도 개편이라는 정부 취지와 달리, 의협은 성분명 처방이 제약산업의 수익구조 악화와 약효 편차, 책임 소재 혼선을 키울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어 향후 입법 논의에 변수가 될 전망이다. 의료 현장의 처방·조제 프로세스와 국민의 약 선택권, 나아가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 경쟁력까지 맞물린 복합 이슈로 부상하는 구도다.  

 

대한의사협회는 27일 오후 3시 의협회관 지하 1층 대강당에서 성분명 처방 관련 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연다고 26일 밝혔다. 정부와 여당은 수급불안 의약품을 대상으로 의사가 제품명이 아닌 성분명으로 처방전을 작성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성분명 처방은 동일 성분을 포함한 여러 제네릭 의약품 가운데 약국 단계에서 약사가 구체적인 제품을 선택해 조제하는 방식으로, IT를 활용한 처방·조제 전산 시스템에도 직접적인 구조 변화를 요구한다.  

이번 조사는 의협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11월 18일부터 20일까지 사흘 동안 진행됐다.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1007명이 온라인 설문에 참여했으며, 결과는 성분명 처방 법안에 대한 찬반 기류와 인식 강도를 정량적으로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표본 규모와 조사 방식에 따라 한계는 있지만, 향후 국회 상임위 논의 과정에서 의료계와 정부가 각자의 논거를 보완하는 참고 자료로 활용될 여지는 있다.  

 

설문 항목은 성분명 처방 법안 추진에 대한 인식, 대체조제 제도와 약사 고지 의무에 대한 이해도, 의약품 부작용 등 발생 시 법적 책임 소재에 대한 인식, 약 선택 선호도, 선택분업 도입 관련 의견 등으로 구성됐다. 특히 성분명 처방 방향이 국민 안전과 실제 의료현장 운영에 어떤 영향을 줄지, 또 정부와 규제기관이 제기해 온 정책 우려에 대해 국민이 어느 정도 공감하는지까지 포함해 보건의료 정책 전반에 대한 체감도를 폭넓게 담은 것으로 전해졌다.  

 

기자회견 발표는 대한의사협회 범의료계 국민건강보호 대책특별위원회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는 황규석 서울특별시의사협회 회장이 직접 맡는다. 의협은 그간 성분명 처방 논의를 공급망 관리 차원의 기술·행정 문제를 넘어, 제약산업 구조와 의료 서비스 책임체계 전반에 걸친 시스템 이슈로 규정해 왔다. 황 회장이 구체적인 수치를 공개하면서 정치권과 정부의 정책 설계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메시지를 내놓을 것으로 관측된다.  

 

황규석 회장은 성분명 처방의 명분으로 내세워진 의약품 수급불안 해소 논리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의약품 공급이 부족해진 근본 원인을 제약사의 제조 수익성 악화에서 찾았다. 가격 규제와 약가 인하로 약을 만들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가 고착되면서 생산 여력이 줄었고, 그 결과 특정 품목의 수급 불균형이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황 회장은 이런 구조가 제약사의 생산·투자 유인을 떨어뜨려 장기적으로는 제약산업 전반의 위기와 국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약효 동등성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어졌다. 황 회장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허가하는 생물학적 동등성 범위가 80에서 120 수준임을 거론하며, 80 수준의 약과 120 수준의 약 사이에는 수십 퍼센트포인트의 약효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성분명 처방 체계 아래에서는 동일 성분 제네릭 간에 이런 편차가 존재할 수 있는데, 환자나 처방 의사가 실제로 어떤 약이 조제되는지 세밀하게 파악하기 어렵고, 장기 복용 환자에서는 효과나 부작용 패턴이 바뀌어도 원인을 특정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시각이다.  

 

책임 소재도 핵심 쟁점이다. 현재는 의사가 특정 제품명을 처방하면 그 선택에 대한 일차적 책임이 의료진에게 집중되는 구조지만, 성분명 처방과 적극적인 대체조제가 결합될 경우 약 선택 책임이 약사와 의사, 제약사 사이에 분산될 여지가 커진다. 이상반응이나 치료 실패가 발생했을 때 어느 단계에서 판단 오류가 있었는지 규명하기가 더 까다로워지며, 환자 입장에서는 책임 추궁의 경로가 모호해질 수 있다는 것이 의협의 주장이다.  

 

성분명 처방과 대체조제 제도는 디지털 헬스케어 시스템과도 맞물린다. 현재 병원과 약국의 처방·조제 지원 소프트웨어는 제품명 기반의 데이터베이스를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성분명 중심 체계로 전환하려면 의약품 코드 체계, 인터페이스, 부작용 추적 시스템까지 광범위한 IT 재설계가 요구된다. 추후에는 처방 내역과 조제 변동 이력을 정밀하게 기록해 인공지능 기반 약물 이상반응 탐지와 실사용 데이터 분석에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성분명 처방과 제네릭 활성화가 의료 재정 절감과 약가 인하, 산업 경쟁 촉진을 위해 폭넓게 활용돼 왔다. 다만 미국, 유럽 등에서는 약효·품질 동등성 검증과 약가·유통 정책을 정교하게 결합해 제네릭 시장을 설계하는 한편, 전자의무기록과 약물 모니터링 시스템을 통해 부작용 추적과 책임 규명 체계를 보완해 온 것으로 평가된다. 국내에서도 제약·바이오 산업 육성과 건강보험 재정 관리, 환자 안전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균형 지점 설정이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의협의 여론조사 결과 발표는 국회 차원의 법안 심사 일정과 맞물려 향후 정책 논의의 흐름을 좌우할 수 있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의료계는 성분명 처방이 구조적 수급 불안과 제약산업 경쟁력 문제를 가리지 못하는 처방이라고 주장하고, 정부와 여당은 약가 구조 개편과 병행되는 성분명 처방 확대를 통해 공급망 안정과 재정 효율을 도모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산업계와 의료계,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추가 논의 기구 필요성도 제기되는 가운데, 제도가 실제 시장과 의료현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산업계와 정책 당국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최영민 기자
share-band
밴드
URL복사
#대한의사협회#성분명처방#제약산업